토론:조득남 장군 정려
2020 국문
초고
조선 후기의 무인 조득남(趙得男)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린 정려.
정려는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으로 조득남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이다.
본관은 한양으로 화현면 화현리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가, 1621년(광해군 13)에 무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후, 병마만호에 이르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강화까지 호종하였고, 1630년(인조 8) 3월 유흥치가 의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서·정충신과 함께 평정하였다. 같은 해 4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할 때도 이를 진압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이시백의 휘하에서 북문을 지키며 결사 항쟁하였다가 수차례 승전하였으나,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인조는 주포(紬布)를 내려 수의를 짓게 하고 북문 아래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의 은전(恩典)으로 정려를 세웠으나,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소실되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01년 5월 포천시의 보조와 유림 및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려는 맞배지붕에 방풍판이 달리 정려각 안에 있다. 바깥에는 충신각 현판이 달려 있고, 안에는‘충신 정략장군 병마만호 공조정랑 조득남 정려지문’을 붉은 판에 흰색으로 새긴 정려가 세워져 있다. 정려각 좌측에는 정려비와 정려복원추진위원회비가, 우측에는 충신조득남장군지단과 함께 고향에서 장례를 치르고 모셨던 상석과 안내비석이 놓여있다.
수정
조선 후기의 무인 조득남(趙得男, 1594~1636)의 애국충절을 기린 정려문과 정려비다. 정려문과 정려비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기리고자 그 행적을 새겨서 세운 문과 비석을 말한다.
조득남은 광해군 13년(1621) 무과에 급제하였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강화까지 호위하여 따라갔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의 휘하에서 결사 항쟁하였다. 수 차례 승전하였으나,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영조 1년(1725)에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세웠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소실되었다. 2001년 5월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려문은 ‘충신각(忠臣閣)’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려각 안에 있다. 정려각 왼쪽에는 정려비와 정려복원추진위원회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인 제단을 마련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