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700여 년 전에 몽골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궐기했던 고려의 마지막 항몽세력인 삼별초가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의한 유적지이다.
삼별초는 고려 조정이 몽골군과 강화를 맺자 이에 반대하여 끝까지 몽골 침략군을 몰아낼 것을 내세워 독자적으로 항몽활동을 계속하였다. 삼별초는 고려 조정이 몽골과 강화를 맺자, 새로운 정부를 세워 강화도에서 전라도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항몽에 나섰으나, 진도가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통정장군 중심의 삼별초가 제주도로 건너와 항파두리성을 쌓고 여·몽연합군과대결하였던 최후의 항쟁지이다.
삼별초군이 축조한 항파두리성은 1.5리에 걸친 토성과 그 안에 축조한 석성의 이중 성곽으로 이루어졌다. 성 내에는 궁궐과 관아 시설까지 갖춘 요새였으나, 지금은 토성만이 남아 있다.
수정 국문
초고
항파두리 항몽 유적은 13세기 후반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에 끝까지 저항한 삼별초 최후의 항전지이다.
삼별초는 고려시대 무인정권이 양성한 고려의 정예 군사집단이었다. 1270년 2월 무인정권이 무너지고 고려 조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맺자, 삼별초는 이에 반대하여 독자적인 항몽활동을 계속하였다. 전라도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남해안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1271년 5월 고려 조정과 몽고군의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된 후 제주로 거점을 옮겼다. 제주로 들어온 삼별초는 항파두리성을 쌓고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1273년 3월 결국 연합군에 함락되었다.
항파두리성이 위치한 곳은 해안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고 해발고도가 200m 내외로, 성에서 해안 일대의 상황을 조망하며 적의 접근을 미리 확인하고 조치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또한 성의 동쪽과 서쪽에는 깊은 골짜기와 2개의 하천이 있어 천연의 방어시설로 사용되었다.
성은 장방형의 내성과 타원형의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현재 토축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내성은 둘레가 약 700m로, 삼별초의 지휘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외성은 전체 둘레는 약 6km, 면적은 약 79만 3000㎡에 달한다. 동서남북에 문이 있고 성 안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항파두리성 주변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샘이 3개소 발견되었으며, 성내의 건물지는 17개소가 확인되었다. 고려시대의 청자 조각과 함께 조선시대의 자기 조각들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항파두리성의 사용 시기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