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정만석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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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조선 후기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정만석(1758~1834)의 묘이다. 정만석의 본관은 온양이다. 1783년(정조 7) 문과에 급제한 뒤 대간직과 암행어사, 병조참의를 지냈다. 1805년(순조 5)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뇌물을 받고 대마도와 주고받은 국가문서를 위조한 역관을 처벌했다. 홍경래의 난 때는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피폐한 민생을 잘 수습하여 생사당이 세워졌다. 감사로 있으면서 홍경래의 난에 관련된 죄인들의 문초를 담당하였으며, 이를 기록한 『관서신미록』과 『계첩기략』을 임금에게 올렸다. 이후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등을 거쳐, 1829년(순조 29) 우의정에 올랐다.

별세 후 장례를 치르는 데 나라에서 예우해주었으나 본가에서는 유언이라 하여 예장을 사양하였다.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제주석, 망주석만 있을 뿐 묘비 하나 건립하지 않았다. 이는 선생의 청백하고 고결한 뜻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기혈이 약해서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자손에 유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정

조선 후기의 문신 정만석(鄭晩錫, 1758~1834)과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이다.

정만석은 정조 7년(1783) 과거에 급제한 뒤 동래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피폐한 민생을 잘 수습하였다고 하여, 백성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살아있는 사람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생사당(生祠堂)을 세운 바 있다. 당시 반란에 관련된 죄인들을 문초한 내용과 판결을 기록한 『관서신미록(關西辛未錄)』과 『계첩기략(啓牒記略)』을 임금에게 올렸다. 이 자료들은 조정에서 반란의 전말을 파악하는 데 주요하게 활용되었다. 이후 여러 요직을 거쳐 1829년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유언에 따라 이를 사양하였다.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던 그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묘소에는 후손들이 최근에 세운 묘비 2기와 혼유석·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