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정기안 선생 묘
2020 국문
초고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정기안(1695~1767) 선생의 묘이다. 정기안의 본관은 온양이며, 조선 명종 때 우의정을 지낸 정순붕(1484~1548)의 후손이다.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 정언, 헌납, 사간, 집의 등을 역임하였고, 1752년(영조 28)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노년에는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만모유고』가 있다. 유교, 불교, 선교는 물론 의술, 음률, 산수에도 정통했다.
묘는 정경부인 진주 유씨와 안산 김씨를 합장했는데 봉분 아래는 낮은 호석을 둘렀으며, 묘 앞에는 묘비 2기와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소 중앙에 위치한 묘비는 1831년(순조 31) 아들 정만석(1758~1834)이 세운 것이다. 이보다 규모가 크지만 팔작지붕에 비신이 대리석인 묘비가 묘소 우측에도 하나 있다. 이 묘비명은 김재찬(金載瓚)이 짓고 이익회(李翊會)가 글씨를 썼으며 유한지(兪漢芝)가 새겼다.
수정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정기안(鄭基安, 1695~1767)과 부인 진주유씨·안산김씨의 합장묘이다. 정기안은 영조 4년(1728)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752년(영조 28)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노년에는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인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만모유고』가 있다. 유교·불교·선교는 물론 의술·음률·산수에도 정통했다.
봉분은 낮은 호석을 둘렀으며, 앞에는 묘비 2기와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순조 31년(1831) 아들 정만석(鄭晩錫, 1758~1834)이 세운 것이다. 이보다 규모가 큰 묘비가 묘소 우측에도 있는데 순조 20년(1820) 건립한 것이다. 문신 김재찬(金載瓚, 1746~1827)이 짓고 이익회(李翊會, 1767~1843)가 글씨를 썼으며 유한지(兪漢芝, 1760~1834)가 전서체로 제액(題額)*을 썼다.
- 제액(題額): 비석의 상단부에 새긴 비의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