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전 왕온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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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고려 원종 11년(1270)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왕실은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에 삼별초군은 반기를 들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 용장으로 내려와 성을 쌓고 왕공을 세워 몽고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다음 해 5월 승화후 온은 고려와 몽고군의 연합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몽고의 홍다구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고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 고개를 “왕무덤재” 또는 “왕무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이 고개에는 주인이 없는 비교적 큰 무덤이 5~6기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묘가 “왕온묘”로 전해지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고려 후기 삼별초 항쟁 때 죽은 왕온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고분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원종 12년(1271) 5월에 “승화후(承化侯) 왕온은 영녕공 왕준의 동모형(同母兄)이다. 왕준이 (삼별초군을 토벌하러 온) 왕희와 왕옹에게 당부하기를, ‘만약 전쟁에서 이긴다면, 마땅히 형을 죽음에서 구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홍다구가 먼저 진입하면서 왕온과 그의 아들 왕환을 살해하였다” 하였다. 이렇게 삼별초의 항쟁 때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총공세에 승화후 온은 홍다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후세 사람들은 이 고개를 ‘왕무덤재’ 또는 ‘왕무덤’이라 불러왔다. 1924년에 만든 『진도군지』에 ‘왕온의 묘는 군의 빙고등(氷庫嶝) 뒤에 있는데 지금은 왕분치(王墳峙)라 하고 돌들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이 고개에는 주인이 없는 비교적 큰 무덤이 5~6기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묘가 ‘왕온묘’로 전해지고 있다. 20~30년 전 도굴당한 채 방치되었던 것을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이동시켜 개축한 것이며, 호석과 석인상이 세워져 있다. 왕무덤 아래에는 20m 거리를 두고 말무덤이 있다.

문맥요소

  • 삼별초의 항쟁 – 사건 - 원종 11년(1270) 고려가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군이 반기를 들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서 남쪽으로 내려와 진도를 근거지로 삼고 몽고에 맞서 싸웠다.
  • 왕무덤재 – 위치 - 삼별초군이 용장성에서 쫓겨 이 고개에 이르러 추격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 승화후 – 묘주 - 1259년(고종 46)에 봉해진 작위명. 고려 현종의 아들 평양공 기의 7대손이다.

1차 수정

고려 후기 삼별초 항쟁 때 죽은 왕온(王溫, ?~1271)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고분이다.

몽고의 침입에 40년 동안 저항하였던 고려 왕실은 1270년 마침내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왕족인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몽고에 맞서 싸웠다. 그 이듬해 왕온은 몽고와 고려 왕실의 연합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몽고의 장수 홍다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 고개를 ‘왕무덤재’라 불러왔다. 이곳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큰 무덤 5~6기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묘가 ‘왕온묘’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무덤은 20~30년 전 도굴당한 채 방치되었던 것을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이동시켜 개축한 것이다. 직경 7m, 높이 2.5m 정도의 원형 봉분이며, 호석과 석인상이 세워져 있다. 왕온의 무덤 아래에 20m 거리에 있는 무덤은 왕온이 탔었다는 말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자문의견

  1. 사적, 매장 위원1
    • 고려 왕실의 연합군에 → 고려 연합군에
    • 왕온의 무덤 아래에 20m 거리에 있는 무덤은 왕온이 탔었다는 말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 왕온의 무덤 아래 20m 거리에 있는 무덤은 그가 탔었다는 말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 왕온 무덤의 문화재적 또는 무덤의 형식상의 특징 등을 보완
  2. 사적, 매장 위원2
    • 적합함. 다만, ‘전 왕온의 묘’는 ‘傳 王溫의 墓’로, 구전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명칭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입장에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다고 판단됨. “王溫의 墓(추정)”정도로 수정할 필요 있음.
    • “당하였고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 “당하여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전해지고 있다’/ ‘전해지고 있다’ / ‘전해진다’와 같이 동일한 서술어가 반복 사용되었음. 두 번째 ‘전해지고 있다’는 ‘추정된다’로 수정하면 반복을 피할 수 있을 듯함.)
    • “무덤 아래에 20m 거리에 있는”→ “무덤에서 20m 아래에 있는”
    • “탔었다는 말의”→ “타던 말의”

2차 수정

고려 후기 삼별초 항쟁 때 죽은 왕온(王溫, ?~1271)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고분이다.

몽고의 침입에 40년 동안 저항하였던 고려 왕실은 1270년 마침내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왕족인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몽고에 맞서 싸웠다. 그 이듬해 왕온은 몽고와 고려 연합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몽고의 장수 홍다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 고개를 ‘왕무덤재’라 불러왔다. 이곳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큰 무덤 5~6기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묘가 ‘왕온묘’로 추정된다.

현재의 무덤은 20~30년 전 도굴당한 채 방치되었던 것을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이동시켜 개축한 것이다. 직경 7m, 높이 2.5m 정도의 원형 봉분이며, 호석과 석인상이 세워져 있다. 왕온의 무덤 아래 20m 거리에 있는 무덤은 그가 탔었다는 말의 무덤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