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장도포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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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장도포대는 조선 고종 16년에 인천으로 진입하는 이양선을 막기 위하여 화도진을 구축할 당시 축조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화도진도에서 이곳에 3개의 포좌가 설치됐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2개는 바다 쪽을 향하고 있고 1개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 각각 외곽과 내곽 수비가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서해로 들어오는 이양선을 막기 위해 1879년(고종 16) 설치했던 장도포대가 있었던 곳이다. 장도(獐島)는 노루섬이라는 뜻으로 ‘노루목’ · ‘노렴’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의 산 이름 ‘댕구산’은 당시 설치되었던 대포 ‘대완구(大碗口)’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대완구는 직경 30cm정도의 조선시대 화포이다.

장도포대는 화도진(花島鎭)이 관할했던 포대로서, 1878년 8월 고종은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 1833~1895)와 강화유수 이경하(李景夏, 1811~1891)에게 인천·부평지역에 해안 진지와 포대를 세울 것을 명하여 이듬해 7월 화도진 및 장도포대, 논현포대(호구포대)를 완성하였다.

「화도진도(花島鎭圖)」에서 장도포대의 위치와 포의 문수,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 상단에 “인천읍에서 동남쪽으로 장도포대까지 10리 떨어져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3문의 포 가운데 2문은 서남쪽을, 1문은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1차 수정

서해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 1879년에 설치했던 장도포대가 있었던 곳이다.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외적이 서해안을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것을 미리 방지할 수 있도록 해안 군사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1878년 고종(1863~1907 재위)은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 1833~1895)와 강화유수 이경하(李景夏, 1811~1891)에게 인천·부평 지역에 군사 진영과 포대를 세울 것을 명하였고, 이듬해 화도진, 장도포대, 논현포대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해안 방어기지는 1894년 군제 개편으로 화도진이 철폐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현재의 포대는 2005년과 2006년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화도진의 모습을 그린 「화도진도(花島鎭圖)」에 의하면 원래 장도포대에는 대포를 설치하는 포좌가 3개 있었으나, 지형 여건으로 인해 2기만 복원되었다.

2차 수정

서해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 1879년에 설치했던 장도포대가 있었던 곳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해지자, 외적이 서해안을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것을 미리 방지할 수 있도록 해안 군사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국가 안위의 필요에 따라 1878년 고종(1863~1907 재위)은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 1833~1895)와 강화유수 이경하(李景夏, 1811~1891)에게 인천·부평 지역에 군사 진영과 포대를 세울 것을 명령하였고, 이듬해인 1879년 화도진, 장도포대, 논현포대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해안 방어기지는 1894년 군제 개편으로 화도진이 철폐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현재의 포대는 2005년과 2006년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화도진의 모습을 그린 「화도진도(花島鎭圖)」에 의하면 원래 장도포대에는 대포를 설치하는 포좌 3기가 있었으나, 지형 여건으로 인해 2기만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