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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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고택은 지곡동 기와집 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데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이 집에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았다. 다만 본체 남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하여 이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중종 때 덕행 높은 이자(李耔, 1480 ~ 1533) 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전하여 ‘전(傳)음애 이자 고택’으로 불리었으나, 여러 차례의 중수로 음애 선생 생전의 가옥형태가 아닌 조선 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2014년 2월 ‘한산이씨음애공파 고택’으로 개칭되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李耔, 1480~1533)가 살던 곳으로 대대로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이다. 그의 호인 음애(陰崖)를 따서 ‘음애선생이 살던 곳으로 전해진다’는 의미인 ‘전음애 이자 고택(傳陰崖李耔古宅)’으로 불리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의 중수로 생전의 가옥 형태가 아닌 조선 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2014년 2월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 1482~1519)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1519년 기성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사림 세력이 화를 입게 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이자도 여기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독서와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현재 가옥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있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으며, 본채 남서쪽 방의 외부에 단청을 칠하여 그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1차 수정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李耔, 1480~1533, 호: 음애)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 1482~1519)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1519년 기성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사림 세력이 화를 입게 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이자도 여기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독서와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어 조선 후기의 가옥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본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있다. 본채는 왼쪽의 사랑채와 오른쪽의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으며, 본채 남서쪽 방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사당 외부에는 단청을 칠해서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했다.

자문의견

  1. 건축, 근대 위원 1
    • “사당 외부에는” -> “제사 공간의 외부에는” -- (사유) 사당이 없음
  2. 건축, 근대 위원 2
    • 문화재 명칭이 맞고, 사실관계가 객관적임.
    • 전문적이고 정확한 의미전달이 필요한 한자어에는 ( )안에 한자를 기입할 필요가 있음.
    • 명칭이나 인명 등 정확히 표기하고 있음.
    • 독창성이나 문화재의 건축적 특징이 부각될 필요가 있음. 예) 건립시기를 알 수 없고, 여러차례 중수되어 조선후기의 가옥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맥과 특징으로 보기에는 어려움

2차 수정

이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李耔, 1480~1533, 호: 음애)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1519년 기성 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사림 세력이 화를 입게 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이자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독서와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차례 중수되어 조선 후기의 가옥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본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있다. 본채는 왼쪽의 사랑채와 오른쪽의 안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이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따로 구분되는 특이한 평면구조를 보인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 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다. 대신 본채 남서쪽 방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단청을 칠해서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