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옥천부원군 조원길 묘 및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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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묘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던 조원길(1344~1391)의 무덤이다. 정몽주와 깊은 교우를 맺었던 조원길은 1369년 과거에 급제한 후 높은 벼슬을 두루 지냈으며,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일으키려하자 조원길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순창으로 낙향하여 고려왕조에 대하여 충성을 바쳤다. 묘표는 1391년 아들 조유가 찬서하였고, 크기는 길이 2m, 폭 50cm, 두께 30cm 정도로서 당시 금석문 연구에 유용한 자료이다.

수정 국문

초고

조원길묘는 이건곡마을에 옥천조씨 시조의 설단(設壇)과 함께 있다. 조원길과 옥천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봉토분으로 묘역의 형태와 배치가 고려시대의 능묘와 매우 유사하다. 묘는 ‘冂’ 자형의 곡장(曲牆)을 두르고 장방형의 석축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묘 정면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로 장명등과 비석, 망주와 인석을 세웠다.

묘소 아래에 있는 묘표는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묘표의 규모는 길이 2m, 폭 50cm, 두께 30cm이다. 마멸이 심해 비문을 식별하기 어려우나 정밀탁본을 통해 1391년 조원길 예장 당시 조원길과 옥천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묘이며, 아들 조유(趙瑜)가 세웠다는 내용을 파악하였다. 조원길의 묘표가 발견되기 이전까지 전라북도에는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 탑비(金堤金山寺慧德王師塔碑)가 유일한 고려시대의 비로 전해졌으나, 조원길의 묘표가 발견되면서 전라북도에 1기의 고려시대 비가 추가되었다. 조원길의 묘와 묘표는 고려시대 묘역과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원길(1344~1391)은 고려 말기 충신으로 정몽주·설장수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어 순창의 옛이름인 옥천의 이름을 따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순창에 농은(農隱)이라는 작은 집에서 세속을 멀리하여 은거하였다. 당대 사람들은 조원길의 충절을 일러 목은(牧隱), 포은(圃隱), 도은(陶隱), 야은(冶隱)과 함께 오은(五隱)이라 칭송하였다.

1차 수정

고려 말의 충신인 조원길(趙元吉)의 묘소와 봉분 앞에 세워졌던 묘표이다. 조원길의 묘표는 현재 묘소 아래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조원길은 공민왕 18년(1369)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두루 지냈다. 고려시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1389~1392 재위)을 옹립한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순창의 옛 이름인 옥천의 이름을 따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순창에서 세속을 멀리하며 은거하였다.

조원길의 묘는 부인 조씨와 함께 장사한 봉토분이다. ‘冂’ 자형의 곡장(曲牆)을 두르고 장방형의 석축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묘비, 망주석, 석인상 등의 석물을 세웠다.

묘표는 원래 묘소 앞의 축대석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마멸이 심해 비문을 식별하기 어려우나 정밀 탁본을 통해 일부 내용을 확인하여 조원길 묘의 묘표임을 확인하였다. 비문에 따르면 조원길의 묘소는 공양왕 3년(1391)에 조성되었으며, 아들 조유(趙瑜)가 묘표를 세웠다. 묘표의 윗부분에만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별도의 받침돌을 두지 않고 땅속에 절반쯤 묻어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옥천부원군 조원길묘 및 묘표(玉川府院君 趙元吉 墓 및 墓標)” → 옥천부원군 조원길 묘 및 묘표(玉川府院君 趙元吉 墓 및 墓標)
    • 고려 말의 충신인 조원길(趙元吉)의 묘소와 봉분 앞에 세워졌던 묘표이다. 조원길의 묘표는 현재 묘소 아래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 고려 말의 충신 조원길(趙元吉)의 묘와 봉분 앞에 세워졌던 묘표이다.
    • 묘표는 원래 묘소 앞의 축대석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 묘표는 원래 묘소 앞의 축대석으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현재 묘소 아래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순창에서 세속을 멀리하며 은거하였다. -> 순창에 내려와서 은거하였다.
    • 조원길의 묘는 부인 조씨와 함께 장사한 봉토분이다. -> 조원길의 묘는 계배(繼配)인 복흥 조씨와 함께 장사한 봉토분이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일부 내용을 확인하여 조원길 묘의 묘표임을 확인하였다.’ =‘확인하다’는 단어가 중복 사용되어 어색함. 둘 가운데 하나를 다른 단어로 바꾸는 것이 필요함.

2차 수정

고려 말의 충신 조원길(趙元吉)의 묘와 봉분 앞에 세워졌던 묘표이다. 묘표는 현재 묘소 아래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조원길은 공민왕 18년(1369)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두루 지냈다. 고려시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1389~1392 재위)을 옹립한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순창의 옛 이름인 옥천의 이름을 따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순창에 은거하였다.

조원길의 묘는 부인 조씨와 함께 장사한 봉토분이다. ‘冂’ 자형의 곡장(曲牆)을 두르고 장방형의 석축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묘비, 망주석, 석인상 등의 석물을 세웠다.

묘표는 원래 묘소 앞의 축대석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마멸이 심해 비문을 식별하기 어려우나 정밀 탁본을 통해 일부 내용을 확인하여 조원길 묘의 묘표임이 밝혀졌다. 비문에 따르면 조원길의 묘소는 공양왕 3년(1391)에 조성되었으며, 아들 조유(趙瑜)가 묘표를 세웠다. 묘표의 윗부분에만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별도의 받침돌을 두지 않고 땅속에 절반쯤 묻어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