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오리 이원익 종택 및 관감당(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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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조선 중기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과 그 종손들이 살았던 종택과 이원익이 만년에 머물렀던 사랑채이다. 이원익은 뛰어난 업무능력과 청렴함으로 선조-광해군-인조 세 임금 대에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이원익 종택은 사랑채인 관감당(觀感堂)과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 안채와 문간채로 구성되었다. 건물 모두 남향으로 동쪽에 안채와 문간채가 있으며, 서쪽에 관감당, 그 뒤편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안채와 문간채는 각각 ‘ㄱ’자형과 ‘ㄴ’자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튼 ㅁ자’형으로 안채와 문간채가 만나는 두 모서리가 약간 떨어져 있다. 안채는 13칸 반으로 대청과 안방, 건넌방, 부엌이 있으며, 문간채도 13칸 규모로 대문 좌우에 방과 부엌, 창고인 광이 있다.
관감당은 1631년(인조 9) 허름한 초가에 거처하던 이원익을 위해 인조가 하사한 집이다. 신하와 백성들이 이원익의 청빈한 모습을 보고 느끼라는 뜻에서 ‘관감(觀感)’이라고 하였다.
사당인 오리영우는 관감당 뒤편에 있다. 1693년(숙종 19)에 세운 것으로 사당 안에는 신주가 아닌 이원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1차 수정
조선 중기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과 그 종손들이 살았던 종택과 이원익이 만년에 머물렀던 사랑채이다. 이원익은 뛰어난 업무능력과 소박한 성품,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아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대에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종택은 사랑채인 관감당(觀感堂)과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 안채와 문간채로 구성되었다. 건물 모두 남향으로 오른쪽에 안채와 문간채가 있으며, 왼쪽에 관감당, 그 뒤편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원익은 2칸 초가에 살고 있었는데, 집에 비가 새자 인조(1623~1649 재위)가 이 집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원익 사후에는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1676년 충현서원(忠賢書院)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19세기 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16년에는 후손들이 옛 집터 위에 관감당을 다시 세웠고, 안채는 1917년에, 문간채는 1940년 경에 지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종택과 관감당 간의 재건과 훼철시기 구분이 필요
- 분야별 자문위원 2
- 명재상 -> 이름난 재상 으로 수정(문화재안내판 가이드 라인 2008에 초등학교 3학년 수준 권고)
- 뛰어난 업무능력 -> 대동법을 추진하는 등 뛰어난 업무능력 (대동법 언급을 요함)
-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대에 모두 ->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대에 걸쳐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1916년에는 후손들이 옛 집터 위에 관감당을 다시 세웠고, 안채는 1917년에, 문간채는 1940년 경에 새로 지었다.
2차 수정
조선 중기의 이름난 재상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과 그 종손들이 살았던 종택과 이원익이 만년에 머물렀던 사랑채이다. 이원익은 뛰어난 업무능력과 소박한 성품,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아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종택은 사랑채인 관감당(觀感堂)과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 안채와 문간채로 구성되었다. 건물 모두 남향으로 오른쪽에 안채와 문간채가 있으며, 왼쪽에 관감당, 그 뒤편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집은 40년 동안 재상을 지낸 이원익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초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인조(1623~1649 재위)가 하사하였다. 이원익 사후에는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1676년 충현서원(忠賢書院)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19세기 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16년에는 후손들이 옛 집터 위에 관감당을 다시 세웠고, 안채는 1917년에, 문간채는 1940년 경에 새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