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중종(中宗) 때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이필간(李弼幹)의 아들 이영(李英)이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동왕 20년(1525) 경에 세운 집이다. 그 후 1925년에 사랑채를 수리하였다고 한다.
이 곳은 한절골이라 불리는데,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면 6칸, 측면 5칸, 배면 4칸의 ‘口’자형의 건물로, 그 규모는 비록 작으나 안마당 대청 앞 기둥의 강한 민흘림 기법이나, 대들보 및 3량가의 동자기둥 등에서 소박한 옛 가옥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특히 창의 중간 문설주를 통하여 이 건물의 처음 건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건물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예안이씨 파조로, 부사 이필간(李弼幹, ?~1514)의 맏아들 이영(李英, 1482~?)이 조선 중종 20년(1525)에 지었다고 한다.
이영은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동생 이전(李荃)·이훈(李薰‚ 1489~1552)과 함께 풍산 지역으로 낙향했고, 이후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집은 ‘ㅁ’자형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전면 오른쪽의 사랑채의 마루가 살짝 돌출되어 있다. 사랑채는 1925년에 수리되었다고 한다. 안채는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두었다. 양쪽 날개채에는 각각 부엌과 고방이 배치되어 있다.
집의 규모는 작지만,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집의 평면 구성이나 대들보에 쓰인 옛날식 가공 수법을 엿볼 수 있다.
- 이 집이 위치한 마을은 한절골이라 불리는데,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집의 이름과 관련한 정보 부족 -> 확인 필요함 (집의 이름이 원래부터 ‘사직공 종택’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임, 이영은 부사직(副司直 : 종5품 무관직)을 지낸 부친 이필간(李弼幹)의 맏아들이므로,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사직공파’의 대를 잇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인지..?)
- 집의 내부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사진 검색 어려움.
- 삼형제가 풍산으로 낙향한 것은 이곳에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인 조안도의 별서(別墅)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차 수정
사직공파 구택은 예안이씨 7세손 이영(李英, 1482~?)이 살던 집으로 중종 20년(1525)에 지었다고 한다.
이영은 조선시대 문신인 사직공 이필간(司直公 李弼幹, ?~1514)의 맏아들이다. 이영은 당시 개혁 정치를 펼치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 사림 세력과 가깝게 교류하였다. 그러나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동생인 이전(李荃, 1486~1529), 이훈(李薰‚ 1489~1552)과 함께 아버지의 외가가 있던 풍산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이필간을 예안이씨 사직공파 파조(派祖)로 추앙하였고, 예안이씨 후손들은 풍산 우렁골(지금의 상리리와 하리리 지역)에 500년 이상 대대로 살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사직공파 구택은 규모는 작지만, 조선시대 경상북도 지방의 전형적인 주택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중문채, 사랑채, 안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앞쪽 오른편에 위치한 사랑채는 1925년에 수리되었다고 한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방을 두었고, 양쪽 날개채에는 각각 부엌과 고방이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