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예산 이성만형제 효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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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원래 가방교(街芳橋) 옆에 서 있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겨 물에 잠길 위기에 놓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대흥호장(大興戶長) 이성만 이순(李順)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자로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성만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고 이순은 아버지의 묘소를 지켰다. 3년의 복제(服制)를 마치고도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1497년(연산군 3년)에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성만 형제 효제비는 고려 전기의 사람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행과 형제의 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1497년(연산군 3)에 건립되었다. 비는 길쭉한 비신 위에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며, 밑에 있는 받침돌은 후대에 와서 만든 것이다. 비신에는 왕이 그 뜻을 기려 정문(旌門)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문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세우도록 한 사실과 자자손손에게 모범이 되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은 마치 비신 위에 모자를 씌운 것 같은 모습으로, 꼭대기에 크고 둥근 머리장식을 얹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 203㎝, 폭 43.5㎝, 두께 25㎝이며 화강암으로 만든 조선 초기 양식이다. 원래 이 비는 가방교(佳芳橋) 옆에 세워져 있었으나 예당 저수지가 생겨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현 위치로 이전시켰다.

대흥호장(大興戶長) 이성만과 이순 형제에 대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0 대흥현조(大興縣條)에 전한다. 이성만과 이순 형제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도 성만은 어머니의 분묘를 지키고, 순은 아버지의 분묘를 지켰다. 3년의 복제를 마치고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을 정도로 효심과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1964년 이후, 이성만 이순 형제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의좋은 형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1차 수정

이성만형제 효제비는 고려시대의 인물인 이성만(李成萬), 이순(李順) 형제의 효행과 우애를 기리기 위해 연산군 3년(1497)에 세워졌다. 원래 가방교 옆에 세워져 있었으나, 예당저수지가 생겨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성만과 이순 형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형이 어머니의 분묘를 지키고, 아우가 아버지의 분묘를 지켰다. 3년상을 마치고 난 뒤에는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을 정도로 효심과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형제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의좋은 형제」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하였다.

효제비는 길쭉한 몸돌 위에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며, 밑에 있는 받침돌은 후대에 와서 만든 것이다. 몸돌에 새겨진 비문에는 왕이 형제를 기려 표창한 사실과 자자손손에게 모범이 되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203㎝, 폭 43.5㎝, 두께 25㎝이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원래 가방교 옆에 세워져 있었으나 → 원래 가방교 옆에 있었으나
    • 어머니의 분묘를 지키고, 아우가 아버지의 분묘를 지켰다 → 어머니의 묘를 지키고, 아우가 아버지의 묘를 지켰다
    • 3년상을 마치고 난 뒤에는 → 3년상을 마친 뒤에는,
  2. 분야별 자문위원 2
    • 깊었다고 한다. 형제의 이야기는 -> 깊었다고 한다. 세종 2년(1402) 이성만, 이순 형제에게 정문(雄門)을 세워 표창하게 하였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이성만형제 효제비는 고려시대의 인물인 이성만(李成萬), 이순(李順) 형제의 효행과 우애를 기리기 위해 연산군 3년(1497)에 세워졌다. 원래 가방교 옆에 있었으나, 예당저수지가 생겨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성만과 이순 형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형이 어머니의 묘를 지키고, 아우가 아버지의 묘를 지켰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을 정도로 효심과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형제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의좋은 형제」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하였다.

효제비는 길쭉한 몸돌 위에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며, 밑에 있는 받침돌은 후대에 와서 만든 것이다. 몸돌에 새겨진 비문에는 왕이 형제를 기려 표창한 사실과 자자손손에게 모범이 되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203㎝, 폭 43.5㎝, 두께 2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