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영덕 처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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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처인당은 영덕 영양남씨 문중의 종가에 속했던 건물의 하나이다. 건립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조선후기 유학자인 남필대(南必大, 1608-1666)가 영영남씨 가운데 영양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남수(南須)의 제사를 위해 사용하였다. 이후 후손인 남달만(南達萬, 1713-1784, 호: 처인당)이 자신의 호인 처인당으로 건물 이름을 정했다. 처인당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선무원종공신을 지낸 남율(南慄)을 비롯한 다수의 인물이 배출되었다.

1차 수정

처인당은 영덕 영양남씨 문중의 종가에 속했던 건물의 하나이다. 건립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유학자인 남필대(南必大, 1608~1666)가 영양남씨 가운데 영양 지역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남수(南須)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 이후 후손인 처인당 남달만(處仁堂 南達萬, 1713~1784)이 자신의 호로 건물 이름을 정했다. 처인당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선무원종공신을 지낸 남율(南慄)을 비롯한 다수의 인물이 배출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집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측면으로 온돌방과 우측 방에는 감실을 두었다. 전면 툇칸에 툇마루를 두고 그와 연접하여 전면으로 계자난간이 있는 헌함마루를 덧달아 내었으며, 좌우측은 평난간을 달았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처인당은 영덕 영양남씨 문중의 종가에 속했던 건물로 1801년의 『처인당기』에는 남필대(南必大, 1608~1666)가 창건하고 남달만(南達萬, 1713~1784)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영덕 일대에 사는 종인들의 회합처가 되었다.
    • 처인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비탈진 경사면에 지어 전면은 2층 누각 구조이다.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두었으며, 전면에 퇴칸을 두었다. 측면을 분할하는 기둥을 중간에 두었으면서도, 전면에 별도로 퇴칸을 두어 일반 민가의 건물과 다른 특색을 보인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조선 후기 유학자인 남필대(南必大, 1608~1666)가 영양남씨 가운데 영양 지역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영양남씨 가운데 영양 지역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 영양 지역에 처음 들어온 영양남씨 조상인) 남수(南須)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

2차 수정

처인당은 영덕 영양남씨 문중의 종가에 속했던 건물의 하나이다. 조선 후기 유학자인 남필대(南必大, 1608~1666)가 영양남씨 가운데 영덕 지역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남수(南須)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창건하였고, 이후 후손인 처인당 남달만(處仁堂 南達萬, 1713~1784)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약 600여 년간 영덕 인량리에 세거해 온 영양남씨 가문의 대표적인 건물로, 문중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비탈진 경사면에 지어 전면은 2층 누각 형태를 하고 있다.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