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처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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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처인당
Cheoindang Hall, Yeongdeok
영덕 처인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덕 처인당
영문명칭 Cheoindang Hall, Yeongdeok
한자 盈德 處仁堂
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인량2길 36 (창수면)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66호
지정일 2018년 8월 9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영덕 처인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처인당은 영양남씨 송정공 남수(南須)가 마을에 들어와 1420년부터 터를 잡고 살았던 곳에 세워진 별채이다. 송정공 8세손인 조선 후기 유학자 용암 남필대가 처음 세웠고, 처인당 남달만(處仁堂 南達萬)이 손보고 고쳤다. 집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침 등은 6.25사변 중 불타서 없어졌다. 현재는 처인당 정자와 사당만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처인당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공을 세운 선무원종공신 남율을 비롯하여 많은 선비들이 나왔다.

정면 4칸, 옆면 2칸으로 비탈진 경사면에 지어 앞면은 2층으로 된 누각 모습이다. 한가운데 2칸의 대청이 있으며, 왼쪽과 오른쪽에 온돌방이 있다. 앞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둘렀다.

영문

Cheoindang Hall, Yeongdeok

This hall was first established by Nam Pil-dae (1608-1666), a Confucian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s the detached quarters of the Yeongyang Nam clan’s head house, which is a residence passed down among the male successors of a family lineage. The current building dates to the 18th century, when it was rebuilt by Nam Pil-dae’s descendant Nam Dal-man (1713-1784). It is considered an important building of the Yeongyang Nam clan, who have been living in the Yeongdeok area since Nam Su, the 8th-generation ancestor of Nam Pil-dae, settled in Illyang-ri Village around 1420.

Most of the buildings of the head house, such as the main quarters, burned down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Only this hall and the family shrine remain. The hall was built on a terraced slope, with the front side made in the style of an elevated pavilion. It has a wooden-floored hall in the center with an underfloor-heated room to either side, and a narrow wooden veranda along the front that is enclosed by a balustrade.

영문 해설 내용

처인당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필대(1608-1666)가 영양남씨 종택의 별채로 처음 지었다. 종택이란 한 집안의 종가가 대대로 사는 집이다. 현재의 건물은 남필대의 후손인 남달만(1713-1784)가 보수하였고, 지금까지도 영양남씨 문중에서 중요한 건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영양남씨는 남필대의 8대조인 남수가 1420년 무렵 인량리 마을로 이주한 이후 대대로 영덕 지역에 세거하고 있다.

종택을 이루고 있던 정침 등의 다른 건물들은 한국전쟁 중 모두 불타서 없어졌고, 지금은 처인당과 사당만 남아 있다. 처인당은 비탈진 경사면에 지어 앞면은 누각 형태를 하고 있다. 가운데 대청이 있고, 양옆에 온돌방이 있으며, 앞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둘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