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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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1703년(숙종 29년) 흥국사의 창건과 중수 등에 대해 기록한 사적비로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인 최창대가 지었으며, 비문을 쓴 이진휴 역시 당대의 명필이었다.
비문에는 창건자 지눌과 무의자 담당과의 관계, 송광사가 세워진 직후 흥국사가 창건되었다는 사실, 1560년(명종 15년) 법수화상에 의해 사찰 건물 1천여간이 증축되었다는 것, 1624년(인조 2년) 계특의 대대적인 사찰 중건의 사실, 통일의 법당 개축사실 등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수비 뒷면에는 정동호가 지은 발문을 문세욱이 썼는데,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보조국사가 흥국사를 창건한 이래 조선에 들어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온갖 고충을 극복하며, 약 470년 동안 중건한 승려들을 높이 평가한 내용이다. 바로 이어서 중건 과정에서 협조한 김덕항을 비롯한 약 140명의 명단이 적혀있다. 중건과정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석공들의 명단까지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중수비의 건립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비석은 흥국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한 사적비로, 1703년에 세워졌다.
천왕문 앞 자리를 건너기 전 왼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 두 마리의 용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에는 지눌의 흥국사 창건과 임진왜란기의 소실, 1560년 법수화상에 의한 사찰 증축, 1624년부터 이루어진 계특대사의 대대적인 중창, 1690년 통일대사의 법당 개축사실 등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최창대(1669-1720)가 지었으며, 이진휴(1657-1710)가 썼다.
뒷면에는 중건과정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석공 등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을 세운 14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동호(1665-1706)가 발문을 짓고 문세욱이 썼다.
- 앞면에는 성능이 주도하여 중수비문을 청한 것과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뒷면은 혜일 석철이 발문을 청한 것,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1차 수정
흥국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하여 1703년에 세운 사적비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 두 마리의 용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에는 지눌의 흥국사 창건과 임진왜란기의 소실, 1560년 법수화상에 의한 사찰 증축, 1624년부터 이루어진 계특대사의 대대적인 중창, 1690년 통일대사의 법당 개축사실 등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창대(1669~1720)가 지었으며, 글씨를 쓴 이진휴(1657~1710) 역시 당대의 명필이었다.
뒷면에는 중건 과정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석공 등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을 세운 14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흥국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하여 1703년에 세운 사적비이다.’ → ‘~ 비석이다.’※ 사적비의 의미가 사찰의 창건과 중창과정을 기록한 비석임
- ‘앞면에는 지눌의 흥국사 창건과 임진왜란기의 소실, 1560년 법수화상에 의한 사찰 증축’→ ‘~ 1560년 법수화상의 규모 확장, 임진왜란때의 소실’ ※ 사건의 시간 순 배열, 사찰 증축은 원문의 중창을 잘못 풀이한 것임.
-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흥국사의 역사가 ~’
- ‘여성을 포함한 신도, 석공 등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을 세운’ → ‘신도, 장인 등 흥국사의 재건과 중건 과정에서 공을 세운’
- 분야별 자문위원 2
- 흥국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하여 1703년에 세운 사적비이다. →흥국사의 창건, 중수 등의 건립 과정을 기록하여 1703년에 세운 중수사적비이다.
- 뒷면에는 중건 과정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석공 등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을 세운 14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임진왜란 등 온갖 고충을 극복하며 중건한 승려들을 높이 평가한다는 내용과 중건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그리고 석공의 이름까지 참여한 14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 두 마리의 용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 귀부, 비신, 이수 등 전문 용어 병기 필요
- 뒷면에는 중건 과정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석공 등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을 세운 14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중수비의 문화재적 가치 언급 필요
2차 수정
흥국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하여 1703년에 세운 비석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두 마리의 용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에는 지눌의 흥국사 창건과 1560년 법수화상에 의한 사찰 중창, 임진왜란기의 소실, 1624년부터 이루어진 계특대사의 대대적인 중창, 1690년 통일대사의 법당 개축사실 등 흥국사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창대(1669~1720)가 지었으며, 글씨를 쓴 이진휴(1657~1710) 역시 당대의 명필이었다.
뒷면에는 임진왜란 등 온갖 고충을 극복하며 사찰을 중건한 승려들을 높이 평가한다는 내용과 함께, 중건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그리고 석공까지 14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