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하회마을 작천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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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이 지어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처음에는 두 채였으나 1934년에 대홍수로 문간채가 쓸려 나가고 지금은 ‘ㅡ’자형의 안채만 남아있다. ‘작천고택’이라는 이름은 류도관 柳道貫 1823~1894 의 택호에서 따온 것이다. 한 건물인데도 사랑방과 안방 사이에 작은 토담을 세워 사랑손님과 부녀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이는 여성과 남성들의 공간을 구별하였던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단출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들의 꼿꼿한 기개를 느끼는 듯하다.

2020 초고

이 건물이 지어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두 채였으나 1934년에 대홍수로 문간채가 쓸려 나가고 지금은 ‘ㅡ’자형의 안채만 남아있다.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이어 사랑방을 두었다. 한 건물이지만 사랑방과 안방 사이에 담장을 세워 사랑손님과 안채 여성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남녀의 공간을 구별하였던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작천’이라는 이름은 현재 소유자의 증조부인 류도관(1823~1894)이 이곳으로 이주하기 전에 살았던 문경 작천리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2020 1차 수정

조선 중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양반가의 살림집이다.

원래의 건물은 두 채였으나 1934년에 대홍수로 문간채가 쓸려 나가고 지금은 ‘ㅡ’자형의 안채만 남아있다.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이어 사랑방을 두었다.

한 건물이지만 사랑방과 안방 사이에 담장을 세워 사랑손님과 안채 여성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남녀의 공간을 구별하였던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작천’이라는 이름은 현재 소유자의 증조부인 류도관(1823~1894)이 이곳으로 이주하기 전에 살았던 문경 작천리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