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하회마을 양오당 고택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집은 서애 西厓 류성룡 柳成龍 의 증손인 부호군副護軍 류만하 柳萬河 1624~1711가 충효당忠孝堂 종택宗宅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그의 아들 주일재主一齋 류후장 柳後章 1650~1706 이 증축하였다. 이 집은 사랑채, 문간채, 안채 일각문과 방앗간채가 마주하고 사당祠堂이 있는 전형적인 전통가옥이다. 대문 앞 안팎을 가리는 아담한 내외담은 옛사람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 집의 규모와 형식은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2020 초고
양오당은 류만하(1624~1711)가 충효당 종택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그의 아들 류후장(1650~1706)이 증축하였다.
류만하는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하회를 대표하는 이름난 재상인 류성룡의 증손자이다.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 대문간과 곳간채를 두고, 동쪽 바깥에 사당을 둔 전형적인 상류층 가옥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담장을 세워 사랑손님과 안채 여성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남녀의 공간을 구별하였던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사랑채에는 현판 두 개가 걸려 있다. 이 집의 이름인 ‘양오당’은 ‘맹자’에서 따온 말로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방문 위에 걸린 현판 ‘주일재’는 류후장의 호를 사랑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2020 1차 수정
양오당은 류성룡의 증손자 류만하(1624~1711)가 충효당 종택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그의 아들 류후장(1650~1706)이 증축하였다.
전면에 사랑채와 중문간채가 일자로 세워져 있고, 그 사이의 중문을 통해 곳간채와 안채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안채 바깥쪽에 사당이 있다.
이 집은 대문채를 두지 않고 길을 따라 쌓은 담장 가운데 트임대문을 내었다. 또 안채 출입 통로인 중문간 앞쪽에 중문간 폭만큼의 짧은 담을 세웠는데, 이것은 바깥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안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사랑채에는 현판 두 개가 걸려 있다. 이 집의 이름인 ‘양오당’은 ‘맹자’에서 따온 말로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방문 위에 걸린 현판 ‘주일재’는 류후장의 호를 사랑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참고
- 류만하(1624~1711): 류성룡의 셋째 증손자.
- 내외담을 세운 곳은 중문 앞.
- 대문채를 두지 않고 길을 따라 쌓은 담장 가운데 트임대문을 내어 출입하게 하였다. 대문이 없기 때문에 노출되기 쉬운 안채를 보호하기 위하여 안채 출입 통로인 중문간 앞쪽에 중문간 폭만큼의 짧은 차면담을 두고 있다. - "안동 하회마을 양오당 고택",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