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진성이씨 두솔원재사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두솔원재사는 진성이씨 가문에서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松安君 李子脩)의 묘를 관리하고 묘제를 지내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10월 15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자수는 진성 이씨의 시조 이석(李碩)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 때 큰 공을 세웠다.
‘ㅁ’자형의 평면으로 이루어진 재사 건물은 1700년대에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전해진다. 처음 지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호의 구성 방식이나 건축 기법 등에서 1700년대의 건축적 특징이 확인된다. 건물은 2017년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실 바로 뒷산에 이자수와 그의 부인이 묻힌 두 개의 봉분이 있고, 입구에는 송안군 유허비 1기가 서 있다.
- 재실 평면 배치 알 수 없음.
- 이자수의 둘째 아들 이운후와 그의 아들 이정의 자손이 안동에 세거하며 크게 번성하였다. 이자수의 5대손이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꼽히는 퇴계 이황이다.
- 뒷산에 있는 두 개의 봉분 중 어느 것이 이자수의 묘인지는 알 수 없다. 두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묘갈은 선조 3년(1600)년에 후손인 이정회가 세웠다.
- 재사가 자리한 서후면에는 안동 삼태사(권행, 김선평, 장정필)의 묘와 묘단, 류중영의 묘가 자리하고 있고, 각 가문에서 선조들의 묘를 관리하고 묘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사가 함께 있다.
1차 수정
두솔원재사는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松安君 李子脩)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제를 지내는 곳이다. 재사 북서쪽에 자리한 언덕에 이자수와 부인이 묻힌 묘소가 있다.
이자수는 진성이씨의 시조 이석(李碩)의 아들이고 고려시대의 문신이다. 충숙왕 17년(1330)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고,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원래 진보(眞寶, 지금의 청송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말년에 마라촌(磨羅村, 지금의 안동 풍산읍 마애리)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안동 지역에 진성이씨 후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두솔원재사를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다. 원래 재사 뒤쪽 밭이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1700년대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2017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다.
두솔원은 재사가 위치한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조선시대 이 마을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관원이나 선비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운영하던 두솔원이라는 여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