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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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불상은 거대한 화강암 석벽에 조각된 불신(佛身) 위에 불두(佛頭)를 따로 제작하여 올린 특이한 형태의 마애불로 머리 뒷부분이 일부 손상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풍만한 얼굴, 큼직한 백호(白毫), 초승달 모양의 깊게 파인 눈썹, 날카롭게 우뚝 솟은 코, 붉게 채색된 도톰하고 굳게 다문 입술 등은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손의 모양은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으며, 불상의 발밑에는 큼직한 단판 연꽃무늬를 새겨 불상 받침으로 삼고 있다. 이 불상과 같은 형식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것으로,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인 조각양식으로 볼 때 11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12.39m이다.

제비원은 성주풀이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또한 많은 전설도 지니고 있는데,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칼을 빼어 불상의 목을 쳤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불상은 거대한 화강암 석벽에 조각된 몸통 위에 머리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올린 형태의 마애불이다.

조각양식으로 볼 때 11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초의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불상 위로 기와지붕이 덮여 있었다고 하며 634년(선덕여왕 3)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불두를 따로 만들어 암벽 위에 새긴 불신 위에 올린 마애불 양식의 거대 불상은 고려 전기에 널리 유행하였으며 이 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이 칼을 빼어 불상의 목을 쳤다는 전설도 있다.

불상이 새겨진 암벽의 맞은편에도 또 다른 암벽이 있고, 두 암벽 사이 좁은 공간의 북쪽 역시 가파른 바위 절벽으로 막혀 있어 이 불상 앞은 석굴처럼 좁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상투모양의 머리가 높게 솟아 있고 얼굴과 눈 코 입을 풍만하면서도 근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머리와 얼굴 일부분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본래는 채색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완전한 입체조각으로 만들어진 머리 부분과는 달리 신체는 천연 암석에 단순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고 있고 왼쪽 어깨에서 길게 내려오는 몇 개의 옷주름이 오른쪽에서 직선으로 흘러내린 법의 자락과 교차되어 접혀 있다. 오른손은 배에 대고 왼손은 가슴 위에서 가운뎃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의 발밑에는 큼직한 단판 연꽃무늬를 새겨 불상 받침으로 삼고 있다. 전체 높이는 12.39m이다.

1차 수정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은 거대한 자연암벽에 몸통을 선으로 새기고 머리 부분을 따로 올린 거구의 불상이다. 이처럼 불상의 머리를 따로 만들어 암벽 위에 새긴 몸통 위에 올린 마애불은 고려 전기에 널리 유행하였으며, 이 불상도 11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12.38m, 머리 높이는 2.43m이다.

머리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肉髻)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은 반듯한 이목구비 사이에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다. 입술에 붉은빛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얼굴에 색을 칠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깊게 새겨져 있다.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고 있고, 옷주름은 매우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양손은 가운뎃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습인데, 이러한 손모양은 아미타불이 중생에게 설법할 때 취하는 아홉 종류의 손모양 중 하나이다. 불상의 발밑에는 큼직한 연꽃무늬를 새겨 불상 받침으로 삼고 있다.

이 불상이 있는 곳은 원래 634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연미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였고 1950년 지금의 법당을 새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