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집은 예안이씨 16세손 근재공(近齋公)의 둘째 아들 풍은(豊隱) 이홍인(李洪仁, 1525~1594)의 종택이다. 조선 명종(明宗) 16년(1551)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구성은 ‘口’자형 몸채와 ‘一’자형 별당인 쌍수당(雙修堂)으로 구성되었다. 남쪽과 서쪽에 외부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쪽은 본래 대문이고 서쪽은 현재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바깥채가 철거된 후에 출입문이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쌍수당’이란 한 집안에 충과 효가 함께 전해 내려온다는 의미로 충신 이홍인과 그의 8세손 이한오(李漢伍)의 효를 기리는 곳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이홍인(李洪仁, 1525~1594) 가문의 종택으로, 조선 명종 16년(1551)에 지어졌다고 한다. 종택은 한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이홍인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풍천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후에 충절을 인정받아 조선 순조 11년(1811)에 정려를 받았다.
집은 ‘ㅁ’자형의 본채와, 본채 서쪽에 있는 별채 ‘쌍수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 건물은 1974년에 해체 후 복원되었으며, 쌍수당은 1999년에 보수가 이루어졌다.
본채는 독립된 영역의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전면에 배치된 사랑채의 오른쪽에는 안채로 진입할 수 있는 중문이 붙어있고, 사랑마루 뒤로 배치된 방들도 안채까지 이어진다.
별채인 쌍수당은 건물의 동편을 난간을 두른 누마루처럼 구성하는 누각 형태로 지어졌으며, 사랑채의 기능을 겸하는 다목적 공간으로 쓰였다. 건물 왼쪽의 마루방은 세 면에 나무 판자로 된 문을 달았고, 건물의 전면과 좌우에 난간을 두른 툇마루와 쪽마루를 시설했다.
사랑채 마루에 걸려있는 ‘충효당’ 편액과 별당에 걸려 있는 ‘쌍수당’ 편액은 모두 한 집안에서 충(忠)과 효(孝)를 모두 갖추었다는 의미로, 이홍인과 그의 후손 중 효행으로 이름나 정려를 받은 이한오(李漢伍, 1719~1793)를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 쌍수당은 이한오를 기리기 위한 건물이라고 하므로,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18세기 말~19세기 초로 추정된다. ‘백원당(百源堂)’이라는 편액이 함께 걸려있는데, ‘백원’은 모든 근원인 효(孝)를 말한다.
- 안채의 방문틀은 중간에 기둥을 세운 고식(영쌍창)으로 되어 있고, 대청의 창호틀은 통창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건물의 기둥 역시 원형, 사각형, 팔각형 등 다양한 형태로 되어 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어, 하나의 건축물 안에서 시기에 따른 건축 양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1차 수정
충효당은 예안이씨 이홍인(李洪仁, 1525~1594) 가문의 종택으로, 명종 16년(1551)에 지어졌다고 한다. 종택은 한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ㅁ’자형의 본채와 누각 형태의 별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채는 1974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이홍인은 예안이씨 풍산 입향조인 이영(李英, 1482~?), 이전(李荃, 1486~1529), 이훈(李薰‚ 1489~1552) 삼형제 중 이전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들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지금의 안동 구담리 지역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충효당이라는 이름은 이홍인의 충절 외에도 그의 후손인 이한오(李漢伍, 1719~1793)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서 지어졌다. 이한오는 편찮으신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학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별당에는 ‘쌍수당(雙修堂)’과 ‘백원당(百源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쌍수당은 ‘충과 효를 함께 닦은 집’이라는 뜻이고, 백원당은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뜻의 ‘백행지원(百行之源)’에서 비롯되었다.
풍산우체국 바로 옆(충효당에서 북서쪽으로 약 750m)에는 이홍인과 이한오에게 내려진 정려를 모신 예안이씨 정충정효각(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