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Chunghyodang House of the Yean Yi Clan, Andong |
|
대표명칭 |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
---|---|
영문명칭 | Chunghyodang House of the Yean Yi Clan, Andong |
한자 | 安東 禮安李氏 忠孝堂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73 (하리1리) |
지정(등록) 종목 | 보물 제553호 |
지정(등록)일 | 1971년 8월 3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충효당은 예안 이씨 이홍인(李洪仁) 가문의 종택으로, 명종 16년(1551)에 지어졌다고 한다. 종택이란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충효당이라는 이름은 이홍인의 충절과 그의 후손인 이한오(李漢伍)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이홍인은 풍산에 처음 정착한 예안 이씨인 이영, 이전, 이훈 삼 형제 중 이전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들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지금의 안동 구담리 지역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한오는 몸이 아픈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며 학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충효당은 ‘口’ 자형의 본채와 누각 형태의 별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채는 1974년에 해체한 후 복원되었다. 별당에는 ‘쌍수당(雙修堂)’과 ‘백원당(百源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쌍수당은 ‘충과 효를 함께 닦은 집’이라는 뜻이고, 백원당은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뜻의 ‘백행지원(百行之源)’에서 비롯되었다.
충효당에서 북서쪽으로 약 750m 떨어진 풍산 우체국 바로 옆에는 이홍인과 이한오에게 내려진 정려**를 모신 예안 이씨 정충・정효각(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이 있다.
- 편액(扁額): 널빤지나 종이, 비단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 위에 거는 액자
-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영문
Chunghyodang House of the Yean Yi Clan, Andong
Chunghyodang House, said to have been built in 1551, is the head house of the descendants of Yi Hong-in (1525-1594) of the Yean Yi Clan. A head house is a residence passed down among the male successors of a family lineage. The name Chunghyodang, meaning “Hall of Loyalty and Filial Piety,” commemorates the patriotic loyalty of Yi Hong-in and the filial devotion of his descendant Yi Han-o (1719-1793).
Yi Hong-in was the second son of Yi Jeon (1486-1529), who, alongside his brothers Yi Yeong (1482-?) and Yi Hun (1489-1552), became the first members of the Yean Yi Clan to settle in Pungsan (present-day Pungsan-eup, Andong). When Japan invaded Korea in 1592, Yi Hong-in gave all of his personal possessions to mobilize a local civilian army and died heroically in a battle in Gudam-ri Village, Andong. Yi Han-o became known for his academic excellence and for taking care of his ill father with the utmost devotion.
The house consists of a main quarters and a pavilion, which serves as a detached quarters. The main quarters has a square layout with a courtyard in the middle. It was dismantled and renovated in 1974. The pavilion features two name plaques. One reads Ssangsudang, meaning “Hall of the Twin Cultivations,” referring to the virtues of patriotic loyalty and filial devotion. The other reads Baegwondang, meaning “Hall of One-Hundred Origins,” which is a reference to how filial devotion is considered the foundation of all things.
About 750 m to the northwest of the house are two pavilions (Gyeongsangbuk-do Cultural Heritage Material) which house commemorative plaques issued to Yi Hong-in and Yi Han-o in recognition of their virtues.
영문 해설 내용
충효당은 예안이씨 이홍인(1525-1594) 가문의 종택으로, 1551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종택은 한 집안의 대를 잇는 후손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충효당이라는 이름은 이홍인의 충절과 그의 후손인 이한오(1719-1793)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서 붙여졌다.
이홍인은 예안이씨 중 풍산에 처음 정착한 이영(1482~?), 이전(1486~1529), 이훈(1489~1552) 삼형제 중 이전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들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지금의 안동 구담리 지역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한오는 몸이 아픈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으며 학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충효당은 본채와 누각 형태의 별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1974년에 해체한 후 복원되었다. 별당에는 ‘쌍수당’과 ‘백원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쌍수당은 ‘충과 효를 함께 닦은 집’이라는 뜻이고, 백원당은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충효당에서 북서쪽으로 약 750m 떨어진 곳에는 이홍인과 이한오에게 내려진 정려를 모신 예안이씨 정충정효각(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이 있다.
갤러리
참고자료
- 『예안이씨 충효당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03.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1792&bbsId=BBSMSTR_1021&mn=NS_03_08_01 -> 1974년 해체복원공사가 이루어졌고, 1999년에 쌍수당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있고 안동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주 대문은 본래 남문이었지만, 서문 바깥에 평행으로 서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후 서쪽 문을 대문으로 이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옆 중문간이 지금은 집 안으로 드나드는 주요 통로가 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중문간이 연결된 것이 특이하다. 사랑마루 뒤쪽으로 서고와 곳간이 붙어있고, 사랑방-중문-마굿간-방이 일렬로 연결되어 안채와 연결된다. / 쌍수당은 본채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별당으로, 누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택 내에서 사랑채의 연장 공간으로 가장의 손님접객, 독서 등 다목적 용도로 쓰여진 건물이다. 건물의 동편을 누마루로 구성해 난간을 둘렀고, 서편에는 온돌방을 두었으며, 동쪽으로 난 계단으로 출입한다.
- [종가] 41.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경북일보, 2017.3.12.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7448 -> 충효당에 들어서면 별당에 쌍수당(雙修堂)이라는 현판이 게판돼 있다. 그 옆으로는 백원당(百源堂)이라는 현판도 보인다. 충과 효는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에 있다. 충과 효를 함께 닦은 집이란 의미다. 백원(百源)이란 모든 근원인 효(孝)를 말한다. 효가 백가지의 근원이 된다고 해서 쌍수당을 백원당으로 일컬었다.
- 안동 예안이씨충효당(보물), Culture & History Traveling, 개인 블로그, 2015.07.01. http://www.dapsa.kr/blog/?p=13426 -> 사진 따라서 집의 구조를 파악하기 쉬움. / 이 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방문. 보통 한옥의 경우에는 방문 중간을 분리하는 문틀이 없으나, 이집에만 있는 양식이라 한다. (사진을 보면 영쌍창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임) 반면에 대청마루에는 방문 중간에 분리하는 문틀이 없는데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 기둥과 마루를 연결하는 부분도 일반적인 한옥과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 예안이씨 충효당,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14 -> 공간 구성은 안채로 출입하는 중문을 중심으로 왼편에 3칸의 사랑 공간을 배치하고 오른편에 마구간과 방 1칸씩을 배치하였다. 사랑 공간은 1.5칸의 사랑방이 중문과 연이어져 있고 그 옆으로 역시 1.5칸의 사랑마루가 놓여 있다. 사랑방과 사랑마루는 쪽마루로 연결하여 출입에 불편함이 없도록 고려하였다. 사랑마루는 좌익사(左翼舍)와 연결되는데 작은 사랑방, 장 단지를 보관하는 장광, 협문이 각 1칸씩 배치되어 안채에 딸려 있는 부엌과 연결된다. 안채는 정면이 6칸, 측면이 1.5칸의 크기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공간의 구성은 왼편부터 부엌 1칸, 안방 2칸, 대청 2칸, 건방 1칸이다. 안방 앞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깔아 대청과 건넌방으로 이동하기가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안채를 구성하기 위한 기둥의 형태는, 전면 가운데 3개의 기둥은 싸리나무로 된 원형 기둥이고 나머지는 소나무를 쓴 사각형의 기둥이다. 또한 부엌의 내부에는 팔각형을 한 기둥이 하나 더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기둥을 볼 수 있다. 우익사(右翼舍)를 구성하는 3칸은 안채의 우측에 자리한 건넌방과 그 앞쪽에 반 칸의 아궁이를 설치한 부엌과 연결된다. 첫 번째 칸은 익사 높이의 중간 정도에 늘마루를 깐 공간과 그 옆으로 광 1칸, 협문 1칸으로 구성되어 ‘ㅁ’자형 건물의 전면 우측과 맞닿는다. 우익사는 늘마루와 광, 광 위에 부설되어 있는 다락 등 주로 집 안에서 사용하는 살림용품들을 갈무리하는 공간들로 배치되어 있다.
-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705530000 ->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서쪽에는 一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가진 ‘쌍수당’이라는 별당이 있다. ‘쌍수당’이란 충과 효를 한 집안에서 다 갖추었다는 의미로, 이홍인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충의를 기리고 그 후손 한오의 지극한 효를 기리는 것이다. 이 집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하고 변형도 되었으나 나직한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풍산평야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상류주택과는 달리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 성격이 강하다.
- 김옥경, 「종가문화 계승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개발 : 보물 553호 예안이씨 충효당파 종택 활용」,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http://www.riss.kr.openlink.aks.ac.kr:8080/link?id=T14017741 -> 근재 이전의 둘째 아들 이홍인은 수신제가를 본분으로 여겼다. 1539년 임권(任權, 1486~1557)이 동지사로 명나라로 갈 때 이홍인을 데려가면서 일을 의논했다. 임권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그를 위해 집을 지어주려고 했는데, “형님도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며 사양하였고, 임권이 그 뜻을 기특하게 여겨 형제의 집을 한꺼번에 지어주었다. 이유인의 집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이홍인의 집은 보수를 거치며 축소되어 남아있는데, 그 집이 충효당이다. / 충효당은 충신과 효자가 함께 정려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당호이다.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이며, 조선 중기 건축이지만 문틀 양식에 있어 고려 말부터 조선 후기의 양식이 모두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부엌과 밖으로 통하는 문 사이에 팔각 기둥이 있는 것이다. / 서쪽에는 쌍수당이라는 별당이 있다. 이는 이홍인의 충의와 그의 후손 이한오의 효를 기리며 충과 효를 한 집에서 모두 닦았다 하여 붙여진 당호이다.
- 이홍인,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474
-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13
주석
- ↑ 『예안이씨 충효당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03.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1792&bbsId=BBSMSTR_1021&mn=NS_03_08_01
- ↑ 『예안이씨 충효당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03.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1792&bbsId=BBSMSTR_1021&mn=NS_03_08_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