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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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소나무판으로 만든 이 현판은 1743년 조정옥이 원래 있던 현판을 보고 다시 쓴 것이다. 주요 내용은 고려 충렬왕 때의 인물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을 성황대신으로 모시고, 매년 단오(端午)에 제사를 올렸다는 것과,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600년 동안 순창 성황당과 성황제의 변화 과정에 대한 것이다. 크기는 가로 180cm, 세로 54cm이며, 한문과 이두가 섞여 있는 글씨는 71행이다. 이 현판은 성황신앙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순창 성황당은 1940년대까지 순화리 옥천동에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수정 국문

초고

이 현판은 순창 지역에서 성황대신에게 제사를 지낸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처음 제작된 것은 1563년으로 이 지역의 관리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이것이 낡게 되자 1633년에 다시 만들었다. 1743년에는 사우(祠宇)를 헐고 대폭 증축하면서 이 현판을 2차로 다시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이다.

현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성황당에는 남신과 여신이 모셔져 있는데 남신은 고려시대의 문신인 이 지역 출신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이고, 여신은 이 지역의 대모산성(大母山城)을 쌓았다고 하는 전설적인 대모(大母)이다. 그 뒤에는 고려시대에 성황신 내외에게 2차례에 걸쳐 작위를 내린 공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는 1743년 당시까지 성황당과 성황제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관련 인사들의 명단을 제시하였다. 이후 1754년과 1823년에 사우를 중건하였는데 이는 현판의 하단에 추가하여 다른 필체로 기록하였다.

이 현판은 성황신앙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볼 수 있는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또한 성황당의 중건과 현판 제작에 관계한 인물들의 명단은 지방 제사와 지방 세력의 관계를 구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아울러 이두로 작성된 고려시대의 공문을 그대로 옮겨 적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공문서 양식이나 이두 이해에도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1차 수정

1281년부터 1823년까지 순창 지역에서 성황대신에게 올리던 제사의 변화 과정을 기록한 현판이다.

현판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순창에서는 남신과 여신을 모셨는데, 남신은 고려시대의 문신인 이 지역 출신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이고, 여신은 이 지역의 대모산성(大母山城)을 쌓았다고 하는 전설적인 대모(大母)이다.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두 성황신에게 작위를 내렸고 이후 성황당을 여러 차례 고쳐 세웠다.

이 현판은 1743년에 만들었으며, 이후 1754년과 1823년에 성황당을 고쳐 지으면서 내용을 추가로 기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성황당이 철거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1992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가로 180㎝, 세로 54㎝ 길이의 소나무판 2개를 위아래로 이어붙여 만들었고, 총 73행, 1,600여 자가 세로로 쓰여있다.

성황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민속자료이다. 또한 한문과 이두가 섞여 이두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1281년(충렬왕 7)부터 1823년(순조 23)까지 순창 지역에서 성황대신에게 올리던 제사의 변화 과정을 기록한 현판으로, 순창 장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현판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순창에서는 오래 전부터 남신과 여신을 모셨다. 남신은 고려 충렬왕 때 문신으로 순창 출신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이고, 여신은 대모산성(大母山城)의 양씨 부인이다. 매년 단옷날에 성대한 제사를 올린 사실과 이후 1823년에 성황당을 개건할 때까지의 사실이 이두와 한자로 기록되어 성황제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 현판은 1743년(영조 19)에 만들어졌으며, 이후 1754년(영조 30)과 1823년(순조 23)에 성황당을 고쳐 지으면서 내용을 추가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성황당이 철거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1992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아래위 두 개의 소나무 판을 이어 붙여 하나로 만들었는데, 크기는 가로 180㎝, 세로 54㎝이다. 총 73행 1,600여 자가 한문과 이두로 작성되었으며, 행마다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다.
    • 현판의 기록을 통하여 『고려사』에 기록된 성황 신앙의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성황 신앙의 변화 모습까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성황 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민속자료로, 당시 사용된 이두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성황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민속자료이다. → 주어 없음. 따라서 “본 현판은 ~ 민속자료이다.”로 수정

2차 수정

1281년부터 1823년까지 순창 지역에서 성황대신에게 올리던 제사의 변화 과정을 기록한 현판이다.

현판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순창에서는 오래전부터 남신과 여신을 모셨다. 남신은 이 지역 출신인 고려시대의 문신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이고, 여신은 대모산성(大母山城)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대모(大母)이다.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두 성황신에게 작위를 내렸고 이후 성황당을 여러 차례 고쳐 세웠다.

현판은 1743년에 만들어졌으며, 이후 1754년과 1823년에 성황당을 고쳐 지으면서 내용을 추가로 기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성황당이 철거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1992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두 개의 소나무 판을 위아래로 붙여 하나로 만들었는데, 크기는 가로 180㎝, 세로 54㎝이다. 총 73행, 1,600여 자가 한문과 이두로 작성되었으며, 행마다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다.

현판의 기록을 통하여 성황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당시 사용된 이두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