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수졸당 및 재사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수졸당은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와 그의 아들 수졸당(守拙堂) 이기(李岐, 1591~1654)의 종택이다. 재사는 동암 이영도의 묘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영도는 영특하고 포용력이 있어 퇴계의 후예답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남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수졸당 및 재사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수졸당은 이영도의 분가 때(17세기), 재사는 이영도의 사후(18세기)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수졸당은 ‘口’자형의 살림집과 그 오른쪽의 ‘一’자형의 정자, 그리고 건물 뒤편의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사는 수졸당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口’자형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집이다. 재사는 건립당시의 평면구조와 구조양식의 변화 없이 옛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수졸당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성리학자 중 한 사람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손자 동암 이영도(東巖 李詠道, 1559-1637)가 분가할 때 지었다고 전하는 살림집이다.
본채 건물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후손들이 이영도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재사이다. 집의 뒷산에 이영도와 이황의 묘가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묘제를 함께 모신다.
이영도는 할아버지 이황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총명함을 칭찬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수졸당은 17세기에, 재사는 18세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수졸당은 ‘ㅁ’자형 구조의 본채, 본채 오른쪽에 있는 정자, 뒤편에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사는 대문채와 몸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의 원래 위치는 이황 선생이 분가 후 자리 잡았던 집터 아래편으로 이 자리에서 100m 가량 떨어진 곳이었는데, 안동댐 건설으로 인해 1975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집의 이름은 이영도의 맏아들 수졸당 이기(守拙堂 李技 1591-1654)의 호를 딴 것이다. 이 집은 이영도의 호를 따서 '동암 종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수졸당 본채의 구조 확인 어려움. / 정자는 오른쪽에 대청마루를 두고 왼쪽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쪽에 난간을 단 쪽마루를 깔았다. 사당 주위에는 낮게 담을 둘러 별도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
- 이 집은 종파의 이름을 따 '하계 종택' 또는 이영도의 호를 따서 '동암 종택'이라 부르기도 한다. 형(이안도)이 일찍 죽어 종가의 후사 문제가 생기자 이영도는 홀로된 형수를 돌보며 둘째 아들을 이억을 큰 집으로 보내 퇴계종가를 보전하였다. 이억이 상계 종가인 형 이안도의 후사를 잇고, 이영도의 맏아들 이기가 하계파를 이룸으로써 이황의 가계는 이영도의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 종택 건물 뒷산에 이영도와 이황, 이황의 큰며느리 봉화금씨의 묘소가 있다.
1차 수정
수졸당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손자 동암 이영도(東巖 李詠道, 1559~1637)가 분가할 때 지었다고 전하는 살림집이다. 수졸당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후손들이 이영도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재사이다. 수졸당은 17세기에, 재사는 18세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집의 뒷산에 이황과 이영도의 묘소가 있어 재사에서 두 사람의 묘제를 함께 모신다.
이영도는 이황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총명함을 칭찬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수졸당과 재사는 원래 이 자리에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1975년 지금 위치로 옮겼다. 수졸당은 ‘ㅁ’자형의 본채, 정자,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고, 재사는 대문채와 몸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의 이름은 이영도의 맏아들 수졸당 이기(守拙堂 李技 1591~1654)의 호를 딴 것이며, 이영도의 호를 따서 동암종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