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졸당 및 재사
수졸당 및 재사 Sujoldang House and Ritual Hou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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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수졸당 및 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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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ujoldang House and Ritual House |
한자 | 守拙堂 및 齋舍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251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0호 |
지정(등록)일 | 2003년 8월 14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 | 4동 |
웹사이트 | 수졸당 및 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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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수졸당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손자 동암 이영도(東巖 李詠道, 1559~1637)가 분가할 때 지었다고 전하는 살림집이다. 수졸당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후손들이 이영도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재사이다. 수졸당은 17세기에, 재사는 18세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집의 뒷산에는 이황, 앞산에는 이영도의 묘소가 있어 재사에서 두 사람의 묘제를 함께 모신다.
이영도는 이황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총명함을 칭찬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수졸당과 재사는 원래 이 자리에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1975년 지금 위치로 옮겼다. 수졸당은 ‘ㅁ’자형의 본채, 정자,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고, 재사는 대문채와 몸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의 이름은 이영도의 맏아들 수졸당 이기(守拙堂 李岐 1591~1654)의 호를 딴 것이며, 이영도의 호를 따서 동암종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문
Sujoldang House and Ritual House
Sujoldang House is said to have been established by Yi Yeong-do (1559-1637), a grandson of the renowned Confucian scholar Yi Hwang (1501-1570), when he moved out of his family home. To the right of the house is a ritual house for preparing ancestral rituals for both Yi Hwang and Yi Yeong-do, whose tombs are located on the mountains behind and in front of the house, respectively. It is said that the ritual house were established in the 18th century, but this is uncertain.
Yi Yeong-do was taught directly by his grandfather and was praised for his intelligenc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he raised a local civilian army and fought against the enemy, and also provided food provisions to the soldiers.
Sujoldang House and the ritual house were originally located about 100 m from their current location but were moved in 1975 due to the construction of the Andong Dam. Sujoldang consists of a main quarters, a pavilion, and a shrine, and the ritual house consists of a main gate quarters and a main quarters. The name Sujoldang comes from the pen name of Yi Yeong-do’s eldest son Yi Gi (1591-1654).
영문 해설 내용
수졸당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이황(1501-1570)의 손자 이영도(1559-1637)가 분가할 때 지었다고 전한다. 수졸당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이황과 이영도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재사이며, 집의 뒷산에는 이황, 앞산에는 이영도의 묘소가 있다. 재사는 18세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이영도는 이황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총명함을 칭찬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하기도 했다.
수졸당과 재사는 원래 이 자리에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1975년 지금 위치로 옮겼다. 수졸당은 본채, 정자,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고, 재사는 대문채와 몸채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이름은 이영도의 맏아들 이기(1591-1654)의 호를 딴 것이다.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
이영도 | Actor | 이영도(李詠道,_1559-1637) | |
이준 | Actor | 이준(李寯,_1523-1583) | |
이황 | Actor | 이황(李滉,_1501-1570) | |
이기 | Actor | 이기(李技,_1591-1654) | 이기의 호는 수졸당이다. |
수졸당 | Place | 수졸당 | |
수졸당_재사 | Object | 수졸당_재사 | |
임진왜란 | Event | 임진왜란(1592) | |
안동댐_건설 | Event | 안동댐_건설 | |
동암종택 | Place | 동암종택 | 이영도의 호를 따서 부름 |
하계종택 | Place | 하계종택 | 이영도의 후손들이 ‘하계종파’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고 함. |
고택체험 | Event | 고택체험 | 현재 고택체험(숙박)을 운영중이다. |
건진국수 | Object | 건진국수 | 종가에서 전해지는 음식이다.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
수졸당 | 이영도 | constructor |
수졸당 | 수졸당_재사 | hasPart |
수졸당 | 동암종택 | sameAs |
수졸당 | 하계종택 | sameAs |
동암종택 | 이영도 | isNamesakeOf |
수졸당 | 이기 | isNamesakeOf |
이황 | 이준 | hasSon |
이준 | 이영도 | hasSon |
이영도 | 이기 | hasSon |
수졸당_재사 | 이영도 | isRelatedTo |
수졸당_재사 | 이황 | isRelatedTo |
이영도 | 임진왜란 | participatesIn |
수졸당 | 고택체험 | isRelatedTo |
수졸당 | 건진국수 | isRelatedTo |
수졸당 | 안동댐_건설 | isRelatedTo |
참고자료
- 수졸당및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443701300000
- 동암종택(수졸당) https://sujoldang.modoo.at/ → 퇴계로부터는 '나를 계적(繼蹟)할 자는 이 아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형이 일찍 죽어 퇴계 후사 문제가 블거졌을 때 동암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다'는 이른바 '형망제급(兄亡弟及)'의 관행을 거부하고 큰 집을 지키고자 했다. 동암은 홀로된 형수를 돌보며 둘째 아들을 성장시켜 혼인과 동시에 큰 집으로 보내 퇴계종가를 보전하였다. 전란 중 여러 고을의 지방관으로 나가 전재민(戰災民)을 구호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여 명관으로 이름을 떨치며 명종때 원주목사를 지냈다. 사후에는 선무원종공신에 추록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다.
- 수졸당 및 재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24 → 완전 ‘ㅁ’자형을 이룬 살림집과 그 오른쪽의 ‘一’자형 정자가 나란히 놓인 뒤편에 ‘一’자형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살림집의 몸채는 5량가로 납도리집이며, 오른쪽의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一’자형 집으로, 내부를 통간으로 구성하여 우물마루를 깔고 신위를 봉안했다. 가구는 3량가로 납도리를 사용한 민도리 형식이다. 재사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6칸으로 구성된 완전 ‘ㅁ’자형으로, 맨 앞쪽 대문채에는 대문간 좌우에 온돌방과 외양간, 광을 두었다. 몸채는 겹집으로 중앙에 마당 폭을 가득 메운 3칸통 대청이 자리 잡았고, 그 좌우측에는 각기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왼쪽 온돌방 앞쪽으로는 부엌, 통래간, 광이 좌익사를, 오른쪽 온돌방 앞쪽으로는 통래간, 온돌방, 통래간이 이어져 우익사를 이루고 있다. 3칸 대청의 앞면은 개방하였고, 배면에는 두 짝 띠장널창을 달았다. 대청과 두 온돌방 사이에 나 있는 2칸 개구부의 한쪽에는 키 작은 외짝 띠살창이, 다른 한쪽에는 키 큰 외짝 굽널띠살문이 달려 있다. 청방간 개구부 형식을 이처럼 창과 문으로 구분한 유형은 18세기 이전에 주로 나타나고 있는 모습으로, 이 건물의 건축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형식이다.
- 이영도,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453 → 둘째 아들 이억이 상계 종가인 형 이안도의 후사를 잇고, 이영도의 후손은 하계파를 이룸으로써 이황의 가계는 이영도의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영도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이황의 가르침을 받았다. 음보(蔭補)로 군자감참봉, 제용감봉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안동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이듬해 연원도찰방, 충청도판관을 지냈다. 1596년 한때 좌천당하였다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상소로 복직된 뒤 원병으로 온 명군(明軍)을 따라 많은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군량미를 조달한 공으로 1597년 호조좌랑이 되고, 다시 호조정랑이 되었다. 1598년에는 현풍현감이 된 이후 김제군수, 청송부사, 영천군수, 익산군수, 원주목사를 역임하고, 1636년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올랐다. 이영도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수졸당 및 재사(守拙堂및齋舍, 수졸당 종택)를 처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