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성석린 선생 묘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020 국문

초고

고려말과 조선초기 문신 성석린(1338-1423)의 묘이다. 아버지는 부원군 성여완이다.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한 뒤 삼사도사, 해주목사 등을 거쳐 1384년(우왕 10) 왜구 침입을 격퇴하여 윤성좌리공신, 창원군 등에 봉해졌다. 조선이 개국 후 초대 판한성부사가 되고, 서북면도순창사, 좌정승 등을 역임했다. 태종 즉위 후에 좌명공신으로 창녕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415(태종 15)에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가 함흥으로 가서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내도 문안하지 못했는데, 성석린이 옛 친구로서 태조가 개경으로 돌아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태종은 이 공을 생각해서 안구마를 내려줬다. 초서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독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이다.

수정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문신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의 묘이다.

성석린은 공민왕 6년(1357)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우왕 6년(1380) 왜구가 침입하자 죽음을 각오하고서 싸울 것을 주장하고 출전하여 격퇴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공신에 책봉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끝난 뒤 함흥에 가 있는 태조에게 태종이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문안하고자 해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성석린이 옛 친구로서 태조를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태종 15년(1415)에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초서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독곡집󰡕이 있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봉분 좌우에 묘비가 있다. 오른쪽 묘비는 1401년(태종 1), 왼쪽 묘비는 세종 5년(1423)에 건립하였다. 문인석과 장명등도 배치되어 있다. 이 묘는 바로 위에 있는 아버지 성여완(成汝完, 1309~1397) 묘와 함께 고려시대의 묘제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서, 조선 초기의 묘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