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울 이시영 묘소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수정 국문

초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정부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의 묘소이다.

그는 고종 22년(1885)에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여러 요직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사직을 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였고, 독립정신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일제 강점 후에는 만주의 서간도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고, 1948년에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그러나 1951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전횡에 반대하여 사임하였다. 1947년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였는데, 이후 신흥전문학관으로 발전하였으며, 한국전쟁으로 잠시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그는 1953년 부산에서 별세하였으며, 9일간의 국민장으로 정릉동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묘소는 2단의 높은 석축과 계단 위에 조성되어 있다. 봉분은 원형으로 병풍석을 둘렀고,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 아래 숲가에는 “성재선생경주이공시영지묘(省齋先生慶州李公始榮之墓)”라고 새긴 묘비가 있다.

1차 수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의 묘소이다.

이시영은 서울의 명가 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10대손이며 한성부판윤과 형조판서 등을 지낸 이유승(李裕承, 1835~?)의 다섯째 아들이다. 1885년 관직에 나아가 여러 요직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평안남도 관찰사로 임명되었고, 부임지에서 근대학교 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만주의 서간도로 이주하였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법무총장에 선임되었고,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광복 이후 1948년에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그러나 1951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전횡에 반대하여 사임하였다. 1953년 부산에서 별세하였으며, 9일간의 국민장으로 정릉동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현재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이시영의 묘소는 2단의 높은 석축 위에 조성되어 있다. 봉분은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두었다. 계단 아래 숲가에는 “성재선생경주이공시영지묘(省齋先生慶州李公始榮之墓)”라고 새긴 묘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