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시영 묘소
서울 이시영 묘소 Tomb of Yi Si-yeong,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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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서울 이시영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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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omb of Yi Si-yeong, Seoul |
한자 | 서울 李始榮 墓所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등록문화재 제516호 |
지정(등록)일 | 2012년 10월 19일 |
분류 | 등록문화재/기타/인물기념시설 |
시대 | 기타 |
수량/면적 | 현항측량면적 1,394㎡ |
웹사이트 | 서울 이시영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1869~1953)의 묘소이다.
이시영은 대한 제국의 신진 개화 관료로서 17세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 외교부 교섭국장, 한성재판소 소장, 평안감사인 평안남도 관찰사 등을 거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이시영은 형제와 가족 40여 명과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에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였고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지내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광복된 뒤에는 귀국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 이념을 잇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7년 지금의 경희대학교인 성재학원 신흥대학을 세웠다.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고, 1951년 5월 9일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성명서에 ‘시위소찬*’이라는 말을 남겼다. 1953년 4월 17일 85세 때 피난처인 부산 동래에서 서거하였고, 전쟁 중임에도 여야는 만장일치로 국민장에 합의하였다. 9일 동안 장례를 치른 뒤 정릉 묘소에 묻혔다가 1964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국가에서는 이시영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묘소는 돌을 2단으로 높게 쌓아 올린 석축 위에 있다.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리는 향로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등 돌로 만든 석물들이 있다. 계단 아래 숲 가에는 ‘성재선생경주이공시영지묘’라고 새긴 묘비가 있다.
- 시위소찬: 벼슬아치가 맡은 일을 하지 못하고 나라에서 주는 곡식이나 재물만 받아먹음
영문
Tomb of Yi Si-yeong, Seoul
This is the tomb of Yi Si-yeong (1868-1953), an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and the first vic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885, Yi Si-yeong started his career as a civil official and served various posts in the new governmental structures of the Korean Empire (1897-1910), such as director of Negotiations at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president of the Hansung Law Court, and the governor of Pyeongannam-do Province.
In 1910, when Korea was illegally annexed by Japan, Yi Si-yeong together with his siblings and about 40 members of his family fled to Manchuria in China. There he established the Military School of the New Rising (Sinheung Mugwan Hakgyo) where he trained many soldiers of the independence army, contributing greatly to Korea’s victory against the Japanese army in the Battle of Qingshanli (Kor. Cheongsan-ri) in eastern Manchuria in October 1920. In 1919, he led the forma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and served as attorney general and minister of finance. He defend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until the liberation of Korea in 1945. After the country regained independence, he returned to Korea. In 1947, he established Sinheung University (today’s Kyung Hee University) to continue the founding philosophy of the Military School of the New Rising.
On July 20, 1948, he was elected as the first vic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On May 9, 1951, in protest against Syngman Rhee’s dictatorship, Yi Si-yeong issued an address to the nation and resigned from the post of vice president. When the Korean War (1950-1953) broke out, he fled to Busan and died there on April 17, 1953. Even during the war, the ruling and the opposition parties unanimously reached an agreement that Yi Si-yeong should have a state funeral. After a nine-day ceremony, Yi Si-yeong was buried in Jeongneung-dong, Seoul. In 1964, his remains were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In 1949, he was awarde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the highest among the Orders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recognition of his outstanding meritorious services to the country.
The tomb was built on a high two-tiered stone platform. The base of the burial mound is surrounded by stone slabs, and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able, an incense table, a lantern, two statues of civil officials, and two pillars. The tombstone is located at the bottom of the stairs leading to the tomb.
영문 해설 내용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1868-1953)의 묘소이다.
이시영은 대한제국의 신진 개화 관료로서 1885년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 외교부 교섭국장, 한성재판소 소장, 평안감사인 평안남도 관찰사 등을 거쳤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이시영은 형제와 가족 40여 명과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였고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지내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광복된 뒤에는 귀국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 이념을 잇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7년 지금의 경희대학교인 성재학원 신흥대학을 세웠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고, 1951년 5월 9일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3년 4월 17일 부산에서 서거하였고, 전쟁 중임에도 여야는 만장일치로 국민장에 합의하였다. 9일 동안 장례를 치른 뒤 정릉동에 묻혔다가 1964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국가에서는 이시영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묘소는 2단의 높은 석축 위에 조성되어 있다.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두었다. 계단 아래 숲가에는 묘비가 있다.
참고자료
- 『2012년도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3.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 서울 이시영 묘소(서울 李始榮 墓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4411105160000
- 이시영(李始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990
- here are better photos of the whole tomb area: https://blog.daum.net/yacho2011/1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