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울 신익희 묘소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수정 국문
초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활동한 신익희(申翼熙, 1894~1956)의 묘소이다.
그는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1913년 귀국한 뒤 중동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전신인 보성법률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1918년 미국 대통령인 윌슨(Wilson, W. 재위 1913~1921)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북경·상해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임무를 맡았다.
1919년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그는 3월에 다시 상해로 떠나 26년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내무차관 및 법무총장 등 여러 직위를 역임하였다.
광복 후 1945년에 귀국하였는데, 당시 신익희는 김구(金九, 1876~1949)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였고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접촉하였다. 이후 3선 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갔는데, 권력의 연장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까지 자행한 이승만에게 민심이 등을 돌리자, 1955년 장면(張勉, 1899~1966)·조병옥(趙炳玉, 1894~1960)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1956년에는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당시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에는 많은 인파가 모여 그의 인기를 실증하였다. 그러나 호남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묘소는 봉분을 원형의 병풍석으로 둘렀으며, 묘비와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설치되어 있다. 묘 입구 오른 길가에 4·19혁명기념비가 서있으며, 그의 묘소는 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1차 수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신익희(申翼熙, 1894~1956)의 묘소이다.
신익희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에서 유학하였다. 1918년 미국 대통령인 윌슨(Thomas W. Wilson, 재임 1913~1921)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만주·북경·상해 등을 드나들며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직후 상해로 떠나 26년간의 망명 생활을 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내무차관 및 법무총장 등 여러 직위를 역임하였다.
1945년 귀국한 뒤에는 국회의장이 되었으며, 1946년 국민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3선 국회의장을 지내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으며, 1950년 민주국민당을 1955년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신익희의 묘소는 상석, 향로석,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을 갖추었으며, 원형 봉분의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