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익희 묘소
서울 신익희 묘소 Tomb of Sin Ik-hui,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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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서울 신익희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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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omb of Sin Ik-hui, Seoul |
한자 | 서울 申翼熙 墓所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산 74-3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등록문화재 제520호 |
지정(등록)일 | 2012년 10월 19일 |
분류 | 등록문화재/기타/인물기념시설 |
시대 | 기타 |
수량/면적 | 현항측량면적 1,401㎡(산127-1㎡/ 923, 산74-3/ 478㎡) |
웹사이트 | 서울 신익희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신익희(1894~1956)의 묘소이다.
신익희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이 각 민족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였다. 이에 힘입어 신익희는 독립을 위한 민중 궐기를 기획하였고,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찾아가 만나고 돌아와 1919년 3·1 독립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간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임시 헌장의 기초를 세우고, 초대 내무차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맡아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중국과 연대한 무장 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중국 국민군에 들어가 제2군 육군 중장이 되었다. 1929년에는 사상과 감정을 초월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한국혁명당을 만들었고 다른 정당들과 통합을 추진한 끝에, 1935년 5개 정당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을 세웠다. 1938년에는 민족혁명당에서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중일 전쟁에 참전하였다. 뒤에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과, 1944년 연립 내각을 세우는 데 이바지하고, 내무부장이 되었다.
1945년, 신익희는 26년 만에 돌아와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반탁 운동과 공산당 국제 조직인 코민테른에 반대하는 투쟁을 선도하는 한편, 국민대학교를 세우고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어 헌법 제정을 주도하였으며, 부의장에 이어 국회의장을 제3대까지 연이어 지냈다. 1955년 야당인 민주당을 만들고, 1956년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유세에 40만 인파가 모이기도 하였다. 5월 5일 새벽에 유세하러 전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신익희의 묘소에는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리는 향로석, 문인 모양의 문인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등 돌로 만든 석물들이 있으며, 원형 봉분의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다.
영문
Tomb of Sin Ik-hui, Seoul
This is the tomb of Sin Ik-hui (1894-1956), a politician and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Born in Gwangju in Gyeonggi-do Province, Sin Ik-hui graduated from the Governmental Hanseong Foreign Language School and studied at the Department of Politics and Economics at Waseda University in Japan. In 1918, he became involv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after having been inspired by U.S. President Woodrow Wilson’s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He met with independence activists in China and, upon his return, led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After this, he went to Shanghai to seek refuge from the colonial suppression where he participa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 drafted the constitu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l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charge as deputy manager of internal affairs, attorney general, and minister of foreign affairs.
In addition, he presumed that armed activities for independence were needed in solidarity with China, so he joined the Chinese military and became a lieutenant general of their inland army. In 1929, he made the Korean Revolutionary Party to enhance the abiliti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1935,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was made by merging five political parties. In 1938, he made the Korean Volunteer Corps and participated in the Second Sino-Japanese War (1937-1945). After this, the Korean Volunteer Corps was incorporated into the Restoration Army. In 1944, he played a role in the making of a coalition cabinet, becoming head of home affairs.
Upon the liberation of Korea in 1945, Sin Ik-hui returned to Korea for the first time in 26 years. He opposed the trusteeship of Korea by the U.S. and Soviet Union and led the activities opposing the Communist International union. He also established Kookmin University, becoming its first dean. At the Constituent Assembly in 1948, he was elected as the first vice-chairman of the assembly, which led him to continue serving as the third chairman of the National Assembly. In 1955, he founded the Democratic Party, and in 1956, he ran for the presidential election, during which a crowd of 400,000 gathered for his campaign opening on the beach of the Hangang River. On May 5, he died from a heart attack inside of a train while going to Jeonju for a campaign event. He was given a state funeral, and in 1962, he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the highest among the Orders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recognition of his outstanding meritorious services to the country.
The base of the round burial mound is surrounded by stone slabs, and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able, an incense table, two statues of civil officials, a lantern, and two pillars.
영문 해설 내용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신익희(1894-1956)의 묘소이다.
신익희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에서 유학하였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돌아와 1919년 3·1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떠났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임시 헌장의 기초를 세우고, 초대 내무차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맡아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중국과 연대한 무장 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중국 국민군에 들어가 육군 중장이 되었다. 1929년에는 독립운동 역량을 높이기 위해 한국혁명당을 만들었고 다른 정당들과 통합을 추진한 끝에, 1935년 5개 정당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을 세웠다.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중일 전쟁에 참전하였다. 뒤에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과, 1944년 연립 내각을 세우는 데 이바지하고, 내무부장이 되었다.
1945년 26년 만에 귀국한 신익희는 신탁 통치를 반대하고 공산당 국제 조직인 코민테른에 반대하는 투쟁을 선도하는 한편, 국민대학교를 세우고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부의장에 이어 국회의장을 제3대까지 연이어 지냈다. 1955년 민주당을 만들고, 1956년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유세에 40만 인파가 모이기도 하였다. 5월 5일 새벽에 유세하러 전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신익희의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들이 있으며, 원형 봉분의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다.
참고자료
- 이현희 외, 『해공 신익희 연구』, 삼화출판사, 2007.
- 『2012년도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3.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 서울 신익희 묘소(서울 申翼熙 墓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4411105200000
- 신익희(申翼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3294
- 신익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0101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