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울 손병희 묘소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수정 국문
초고
일제 강점기 민족대표의 수장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천도교의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묘소이다.
그는 고종 19년(1882)에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2년에는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 등과 함께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에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에서 그는 북접(北接)의 동학 교도들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 1855~1895)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牛金峙) 전투에서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배하자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그곳의 교세 확장과 포교에 힘썼다.
그는 1897년부터 실질적인 동학의 교주로서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06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하였다. 그는 종교적인 활동 이외에 독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는데, 1919년 발발한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33인 가운데서도 수장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월 1일 태화관(泰和館)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고 3월 5일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듬해 병세가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며, 1922년 세상을 떠나 6월 5일에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62년에는 국가에서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묘소는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3면에 곡장이 있고, 봉분을 둘러싼 원형 병풍석 중앙에는 천도교의 휘장이 새겨져 있다. 망주석, 상석, 향로석, 묘비를 갖추고 있으며, 왼쪽 숲에는 부인 현풍 곽씨(玄風郭氏)와 주옥경(朱玉卿)의 묘소가 나란히 모셔져 있고, 모두 천도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1차 수정
일제강점기 천도교 교주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묘소이다.
손병희는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1882년 동학에 입문한 뒤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의 수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전봉준(全琫準, 1855~1895)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배하자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교세 확장과 포교에 힘썼다.
1897년부터 동학 교주로서의 실질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1906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하였다. 종교적인 활동 이외에 독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고, 민족대표 33인의 수장으로 1919년 3월 1일 거행된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다. 선언식을 마친 후 일본 경찰에 통보하여 자진 검거되었으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듬해 병세가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옥한 뒤에는 상춘원(지금의 종로 숭인동에 있던 집)에서 요양하다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국가에서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손병희의 묘소는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원형 봉분 양옆과 뒤쪽에 곡장을 세웠다. 봉분 아래쪽에는 천도교 휘장 문양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다. 봉분 앞쪽에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묘비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왼쪽 숲에는 부인 현풍곽씨(玄風郭氏)와 주옥경(朱玉卿, 1864~1982)의 묘소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인근에는 천도교에서 항일운동을 이끌 지도자를 양성하던 봉황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