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손병희 묘소
서울 손병희 묘소 Tomb of Son Byeong-hui,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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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서울 손병희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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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omb of Son Byeong-hui, Seoul |
한자 | 서울 孫秉熙 墓所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산 28-1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등록문화재 제515호 |
지정(등록)일 | 2012년 10월 19일 |
분류 | 등록문화재/기타/인물기념시설 |
수량/면적 | 현항측량면적 1,538㎡ |
웹사이트 | 서울 손병희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이곳은 천도교 제3세 교조이자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영도자인 의암(義菴) 손병희(1861~1922) 선생의 묘소이다.
손병희는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1882년 동학에 입도한 뒤 2세 교조인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통령으로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를 휩쓸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이 개입하며 혁명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7년에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조가 된 손병희는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어 대고천하(세상에 널리 알림)하였다. 종교 활동과 함께 교육 운동과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듬해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이곳에서 독립운동의 핵심 역할을 담당할 교역자 483명을 양성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는 기독교, 불교와 연합하여 민족대표 33인의 수장으로 우리나라 독립을 선언하고 주도하였다. 독립 선언 후 일제에 의해 내란죄로 기소된 손병희는 1920년 10월 30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상춘원(지금의 종로 숭인동)에서 요양하다 1922년 5월 19일에 순국하였다. 1962년에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죽은 뒤 훈장을 줌)하였다.
손병희의 묘소는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형 봉분 양옆과 뒤쪽에 나지막한 담인 곡장을 세웠으며, 봉분 아래쪽에는 천도교 휘장인 궁을장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다. 봉분 앞쪽에는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리는 향로석, 한 쌍의 망주석, 묘비 등의 석물이 있다. 묘소 오른쪽 아래에 봉황각이 있으며, 왼쪽 숲에는 부인 현풍 곽씨와 주옥경의 묘소가 나란히 있다.
영문
Tomb of Son Byeong-hui, Seoul
This is the tomb of Son Byeong-hui (1861-1922), a religious leader and prominent leader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Born in Cheongju, Son joined the indigenous religious movement called Donghak (“Eastern Learning”) in 1882 and became the protege of the movement’s 2nd leader Choe Si-hyeong (1827-1898). During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of 1894, the joint army led by Jeon Bong-jun (1855-1895) and Son Byeong-hui swept through the regions of Jeolla-do and Chungcheong-do pushing back the royal army to the north. However, due to the interference of the Japanese forces, they were eventually defeated in the Battle of Ugeumchi. As a fugitive, Son hid in the areas of Hamgyeong-do and Pyeongan-do while trying to expand and promote the Donghak movement.
In 1897, Son was ordained as the 3rd leader of Donghak, and in 1905, trying to legitimize the religious movement, he initiated its modernization and changed its name to Cheondogyo (“Religion of the Heavenly Way”). Apart from his work as a religious leader, Son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was one of the 33 national leaders who formed the core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Having signed the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Son voluntarily surrendered to the Japanese colonial police and received a three-year imprisonment sentence which he was to serve at Seodaemun Prison. However, in the following year due to complications with health, he was released on bail and stayed under medical treatment at his house in Sungin-dong where he died. In 1962, Son posthumously awarde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the highest among the Orders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recognition of his outstanding meritorious services to the country.
The tomb is located on a high hill and consists of a burial mound surrounded on the sides and back by an enclosure wall. The base of the burial mound is reinforced around the sides with stones and features the symbol of Cheondogyo engraved in the front. The stone sculptures in front of the tomb include a table, an incense table, two stone pillars, and a tombstone. The tombs of Son’s two wives, Lady Gwak and Ju Ok-gyeong (1864-1982), are located next to each other to the left of his tomb. Bonghwanggak Hall, built by Cheondogyo to educate future leaders of the anti-Japanese movement, is located nearby.
영문 해설 내용
일제강점기 종교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손병희(1861-1922)의 묘소이다.
손병희는 청주 출신으로, 1882년 동학에 입문한 뒤 천도교 제2세 교조인 최시형(1827-1898)의 수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전봉준(1855-1895)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를 휩쓸고 북쪽으로 올라가 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배하자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동학의 교세 확장과 포교에 힘썼다.
1897년부터 동학 교조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조에 취임하였다. 종교 활동 이외에 독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고, 민족대표 33인의 수장으로 1919년 3월 1일 거행된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다. 선언식을 마친 뒤 일본 경찰에 연락해 스스로 체포되었으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듬해 병세가 나빠져 보석으로 감옥을 나온 뒤에는 지금의 종로 숭인동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요양하다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국가에서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손병희의 묘소는 높다란 언덕 위에 있으며, 원형 봉분 양옆과 뒤쪽에 나지막한 담장을 세웠다. 봉분 아래쪽에는 천도교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다. 봉분 앞쪽에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묘비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왼쪽 숲에는 두 부인 현풍곽씨와 주옥경(1864-1982)의 묘소가 나란히 있다. 인근에는 천도교에서 항일운동을 이끌 지도자를 양성하던 봉황각이 있다.
참고자료
- 『2012년도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3.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 서울 손병희 묘소(서울 孫秉熙 墓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4411105150000
- 손병희(孫秉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0507
- 손병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0200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