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울 김창숙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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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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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국문

초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교육가·정치가로 활동한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묘소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을 비롯한 매국5적을 성토한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에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30여 명이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의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을 “제1차 유림단사건”이라고 부른다.

1924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역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이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가 나자, 다시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1859~1925)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의원을 지내는 한편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정치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김구(金九, 1876~1949)와 함께 민족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 때에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그의 묘소는 봉분에 원형의 병풍석을 둘렀고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비석도 2기가 있다. 현재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1차 수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교육가·정치가인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묘소이다.

김창숙은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일찍이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을 비롯한 매국 5적을 성토한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파리장서(巴里長書)라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이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와 해외 각지에 송부하였다. 1924년 이후로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역에 한인동포들의 집단 거주지와 독립운동기지를 조성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광복 후에는 민주의원을 지내는 한편 전국의 유림을 결속하여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였고, 1946년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김구(金九, 1876~1949)와 함께 민족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 때에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김창숙의 묘소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을 갖추었으며, 원형 봉분의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