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김창숙 묘소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서울 김창숙 묘소
Tomb of Kim Chang-suk, Seoul
대표명칭 서울 김창숙 묘소
영문명칭 Tomb of Kim Chang-suk, Seoul
한자 서울 金昌淑 墓所
주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4
지정(등록) 종목 국가등록문화재 제518호
지정(등록)일 2012년 10월 19일
분류 등록문화재/기타/인물기념시설
수량/면적 현항측량면적 728㎡
웹사이트 서울 김창숙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교육가·정치가인 김창숙(1879~1962)의 묘소이다.

김창숙은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일찍이 이름난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성리학을 익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완용을 비롯해 을사조약에 찬성한 5명의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청참오적소’를 올리고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유교를 믿고 따르는 전국의 유림들과 함께 독립 청원서인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와 국내외 곳곳에 보냈다. 1925년부터 만주와 몽골 접경 지역에 한인 동포들의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독립기지 개척운동을 펼쳤으며, 192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보내졌고, 14년 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광복된 뒤에는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민주 의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에는 전국의 유림을 결속하여 유도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세워 초대 학장과 총장을 지냈다. 또한, 김구와 함께 민족 분열을 막으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며, 이승만 정권 때에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5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이곳에 묻혔다.

김창숙의 묘소에는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리는 향로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등 돌로 만든 석물들이 있으며, 원형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다.

영문

Tomb of Kim Chang-suk, Seoul

This is the tomb of Kim Chang-suk (1879-1962), an anti-colonial independence activist, neo-Confucian scholar, educator, and politician.

Born in Seongju in Gyeongsangbuk-do Province, Kim Chang-suk began studying neo-Confucianism early on by seeking out one renowned scholar after another. After the Japan-Korea Treaty of 1905, when Korea was illegally forced to become a protectorate of Japan, Kim Chang-suk published an address criticizing the five ministers, including Yi Wan-yong (1858-1926), who agreed to the infamous treaty. As a result, Kim was arrested and imprisoned. When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broke out in 1919, Kim together with other neo-Confucian scholars who were unable to participate in the demonstrations directly, wrote a petition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known as the “Paris Document,” and sent it to the Paris Peace Conference and various places in Korea. In 1925, he started the construction of collective housing for Koreans who lived on the borders near Manchuria and Mongolia and launched a campaign to set up a base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to train its forces. In 1926, he was elected vice-chairman of the Provisional Legislative Council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In 1927, he was arrested by secret agents of the Japanese police and sent back to Korea. He was sentenced to 14 years in prison, which he served in Daegu and Daejeon.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in 1945, He was also an active member of an advisory organization of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1945-1948). In 1946, he united neo-Confucian scholars from all over the country to create the Association of the Confucian Way (Yudohoe) and re-establish the traditional national Confucian academy as the modern Sungkyunkwan University, becoming its first dean. He strongly opposed the establishment of a separate South Korean government in 1948, and together with Kim Gu (1876-1949), a Korean statesman politician and presid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he worked to prevent national division. Kim Chang-suk fought against the dictatorship and corruption of Syngman Rhee (1875-1965), the first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48-1960). In 1962, Kim was awarde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the highest among the Orders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recognition of his outstanding meritorious services to the country. On May 10 he passed away. After a state funeral, his remains were buried in this tomb.

The base of the round burial mound is surrounded by stone slabs, and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able, an incense table, a lantern, and two pillars.

영문 해설 내용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 교육가, 정치가인 김창숙(1879-1962)의 묘소이다.

김창숙은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일찍이 이름난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성리학을 익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완용(1858-1926)을 비롯해 을사조약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리고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들과 함께 독립 청원서인 ‘파리장서’를 작성하였고,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와 국내외 곳곳에 보냈다. 1925년부터 만주와 몽골 접경 지역에 한인 동포들의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독립기지 개척운동을 펼쳤으며, 192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보내졌고, 14년 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광복된 뒤에는 미군정의 자문기관에서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에는 전국의 유림을 결속하여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를 세워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김구(1876-1949)와 함께 민족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승만 정권 때에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5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이곳에 묻혔다.

김창숙의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들이 있으며, 원형 봉분의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