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삼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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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삼은각은 고려 때 절의를 지킨 포은 정몽주 · 목은 이색 · 야은 길재 등 삼은(三隱)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계룡산 동쪽 기슭 반포면 학봉리에 위치한 동학사(東鶴寺)에 위치한 삼은각은 1394년(태조 3) 야은 길재가 고려 태조의 원당을 동학사에서 영월, 운찬 두 스님과 함께 고려의 모든 왕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절 옆에 단을 쌓아 그의 스승인 정몽주의 제사를 올린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1399년(정종 1)에는 유방택이 다시 단을 중시하고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에 대한 초혼제를 지냈다.

그 다음해에 공주목자 이정간이 이곳에 정각을 지었는데 이후 길재가 죽자 후학들이 이를 추배하여 세 사람의 호를 따 ‘삼은각’이라 이름 붙였다. 세조때 유방택과 이숭인, 나계종을 합사하여 6인의 제사를 지냈으나 이름은 그대로 ‘삼은각’이라고 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으로 동학사가 불타면서 삼은각도 함께 소실되었다가 1916년 삼은만을 모신 삼은각 1칸이 재건되었고, 1924년 도은 이숭인과 죽헌 나계종 등을 추가로 배향하게 됨에 따라 6인의 위패를 모신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 지자체에서 보내준 자료에서는 1399년(정종 1)에 유방택이 단을 중수하고 이색과 길재의 혼을 불러 제사하였다고 서술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길재는 1419년에 졸하였기 때문에 이 때 제사를 올렸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향토문화전자대전> ‘삼은각’의 설명에 따라 유방택이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의 제를 올렸다는 내용을 기입하였습니다.

초고 수정

삼은각은 고려가 말 절의를 지킨 절의를 지킨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건물의 이름인 '삼은(三隱)'은 이 세 사람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내에 위치하고 있는 삼은각은 조선 태조 3년(1394)에 길재가 이 절의 승려 운선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과 충정왕·공민왕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절 옆에 단을 쌓아 스승인 정몽주의 제사를 올린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정종 1년(1399년)에 류방택(柳方澤, 1320-1402)이 단을 정비한 후 정몽주와 이색의 초혼제를 지냈고, 이듬해에 공주목자로 부임해 온 이정간(李貞幹,1360-1439)이 이곳에 건물을 지었으며, 세종 3년(1421)에는 류방택의 후손 류백순이 길재를 추가 배향한 후 전각의 이름을 삼은각이라 불렀다고 한다.

세조 때 류방택과 이숭인(李崇仁, 1347-1392), 나계종(羅繼從, 1339-1415)을 추가로 배향해 6인의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반란으로 동학사가 불타면서 삼은각도 함께 소실되었는데, 1916년에 정몽주, 이색, 길재만 모신 삼은각 1칸이 재건되었다. 1924년에는 유방택과 이숭인, 나계종을 다시 배향하면서 6인의 위패를 모시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차 수정

삼은각은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삼은(三隱)’은 이 세 사람을 총칭하는 말이다.

삼은각의 역사는 조선 태조 3년(1394)에 길재가 고려 태조의 원당인 동학사(東鶴寺)를 찾아와, 고려 왕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단을 쌓아 스승인 정몽주의 제사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정종 1년(1399년)에 문신이자 천문학자인 유방택(柳方澤, 1320~1402)이 단을 정비한 후 정몽주와 이색의 초혼제를 지냈고, 이듬해 공주목사로 부임해 온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이 이곳에 건물을 지었다. 세조(1455~1468 재위) 때 유방택, 이숭인(李崇仁, 1347~1392), 나계종(羅繼從, 1339~1415)을 추가로 모셨다.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반란으로 동학사가 불타면서 삼은각도 함께 소실되었으며, 1916년에 정몽주, 이색, 길재만을 모신 삼은각 1칸이 재건되었다. 1924년 유방택, 이숭인, 나계종을 다시 배향하면서, 현재 삼은각에는 6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풀이 달기 : 1924년 유방택, 이숭인, 나계종을 다시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하면서,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첫 줄 수정 : 삼은각은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삼은(三隱)’은 이 세 사람을 총칭하는 말이다.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를 ‘삼은(三隱)’이라 하며, 삼은각은 이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풀이 달기 :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이 적힌 나무패)를 모신 사당이다. / 초혼제(전사하거나 순직한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고,
    • 소실되었으며 -> 불타 사라졌으며 / 재건되었다. -> 다시 세웠다

2차 수정

삼은각은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삼은(三隱)’은 이 세 사람을 총칭하는 말이다.

삼은각의 역사는 조선 태조 3년(1394)에 길재가 고려 태조의 원당인 동학사(東鶴寺)를 찾아와, 고려 왕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단을 쌓아 스승인 정몽주의 제사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정종 1년(1399년)에 문신이자 천문학자인 유방택(柳方澤, 1320~1402)이 단을 정비한 후 정몽주와 이색의 초혼제를 지냈고, 이듬해 공주목사로 부임해 온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이 이곳에 건물을 지었다. 세조(1455~1468 재위) 때 유방택, 이숭인(李崇仁, 1347~1392), 나계종(羅繼從, 1339~1415)을 추가로 모셨다.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반란으로 동학사가 불타면서 삼은각도 함께 불타 사라졌으며, 1916년에 정몽주, 이색, 길재만을 모신 삼은각 1칸이 재건되었다. 1924년 유방택, 이숭인, 나계종을 다시 배향하면서, 현재 삼은각에는 6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