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보령 수부리 귀부 및 이수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비신 없이 귀부(받침돌)와 이수(머릿돌)만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주인공과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조각의 기법이 화려하고 섬세하여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귀부는 거북을 형상화하여 얼굴, 턱수염, 발, 꼬리 등 생동감있게 조각되었고, 이수는 중앙의 전액 문양만 새겨져 있고, 용과 구름 문양이 잘 표현되어 있다.
원래는 없었던 비신의 규모를 추정하여 조립하였고, 주변의 팔각원당형 부도편이 보존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구조물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탑비의 받침돌인 귀부(龜趺)와 머릿돌인 이수(螭首)로, 현재 탑비는 남아 있지 않고 이 둘만 남아 있다.
원래는 주변 폐사지에 있던 것을 수습하여 이곳 단원사(團圓寺)로 옮겨 온 것이다. 단원사는 신라시대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가 창건한 사찰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937년에 중창되었다.
귀부의 머리부분은 어룡(魚龍)으로 눈은 부리부리하며 코는 뭉툭한데 코의 오른쪽은 마멸되어 있다. 입은 귀 밑까지 표현되었고, 위아래 치아의 배열이 선명하고, 머리에는 뿔이 조각되어 있으며, 수염은 목까지 새겨져 있다. 입가에 지느러미 모양의 날개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특징이다. 등에 거북이 등껍질 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후면에 꼬리가 표현되어 있다.
이수의 전면에는 용과 구름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가운데 사각형 액자모양의 제액(題額)이 4등분되어 있으나 글씨는 없다.
탑비가 없어 주인공을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어느 유명한 승려의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수정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의 귀부(龜趺, 거북 모양 받침돌)와 이수(螭首, 머릿돌)이다. 현재 귀부와 이수 사이에 있는 검은 비석은 ****년에 새로 만들어 넣었다.
원래 주변의 사찰터에서 발견되었던 것을 이곳 단원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단원사는 신라시대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가 창건한 사찰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937년에 중창되었다. 이 비는 어느 유명한 승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원래의 비석이 남아있지 않아 주인공을 알 수 없다.
귀부의 머리 부분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가 뭉툭하며 머리에는 뿔이 새겨져 있다. 입가에 지느러미 모양의 날개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까지 만들어진 귀부의 특징이다. 이수에는 용과 구름 문양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가운데 있는 사등분된 사각형 모양의 제액(題額)은 원래 비의 이름을 새기는 곳인데, 이 이수는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현재 귀부와 이수 사이에 있는 검은 비석은 ****년에 새로 만들어 넣었다.’
- 비신(碑身, 글이 새겨지는 비의 몸돌)
- 년에 → 정확한 연도 확인 불가시 ‘현대에 비를 수리하면서’ 정도로 작성
- 비신(碑身, 글이 새겨지는 비의 몸돌)
- ‘1937년에 중창되었다’ → ‘1937년에 재건하였다.’
- ‘원래의 비석이 남아있지 않아 주인공을 알 수 없다.’ → ‘~비신이 ~’
- 현재 귀부와 이수 사이에 있는 검은 비석은 ****년에 새로 만들어 넣었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고려시대 비석의 귀부(龜趺, 거북 모양 받침돌)와 이수(螭首, 머릿돌)이다. 현재 귀부와 이수 사이에 검은 비석은 최근에(****년에?) 새로 만들어 넣었다.
- 단원사 주변 폐사지에서 발견되어 이 절의 경내로 옮겨왔다고 한다. (단원사의 것인가요? 아니라면 단원사 관련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
- 발을 내밀어 웅크리고 있는 자세의 귀부는 방형의 받침돌과 한 돌로 만들어졌다. 용의 얼굴은 부리부리한 눈과 눈 위에 굵은 눈썹이 강조되어 있고, 입가의 아귀 지느러미와 수염 등이 표현되어 있다. 등에는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무늬로 장식된 비를 세우는 비좌가 있다. 머릿돌 이수는 용과 구름문으로 가득하며, 앞면 중앙에는 사등분된 사각형 모양의 제액이 있는데 새긴 글자가 없어 비석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고려시대 귀부와 이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경기도 여주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7)의 조형을 모방하고 있으나 규모나 조형기법이 뒤떨어진다. 따라서 그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현재 귀부와 이수 사이에 있는 검은 비석은 ****년에 새로 만들어 넣었다. → 원래 비신(몸돌)은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의 것은 새로 만든 것이다.
- 현재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사찰명은 ‘영수암’으로 알려져 있음. 또한 이 비는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므로, 문화재 안내판에 현 사찰에 대한 정보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명기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됨. 이보다는 비가 원래 있던 곳에 대한 정보를 추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함.
- 이 비는 어느 유명한 승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원래의 비석이 남아있지 않아 주인공을 알 수 없다. → ‘비석’이라는 용어보다는 ‘비신’이라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함.
- 이 귀부 및 이수가 비신이 없음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가 무엇인지 언급할 필요가 있음.
- 첫머리에는 고려시대 작품이라 언급하였으나, 이 문단에서 ‘지느러미모양의 날개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후기부터 고려시대까지 만들어진 귀부의 특징이다.’라 언급하여 제작 시기 판단에 혼란을 줌. 고려시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간략한 이유를 명기할 필요 있음.
- 인근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와의 비교, 혹은 성주사지와의 관련을 언급할 필요 있음.
2차 수정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의 귀부(龜趺, 거북 모양 받침돌)와 이수(螭首, 머릿돌)이다. 현재 귀부와 이수 사이에 있는 검은 비신(碑身, 글이 새겨지는 비의 몸돌)은 현대에 비를 수리하면서 새로 만들어 넣었다.
원래 주변의 사찰터에서 발견되었던 것을 이곳 영수암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비는 어느 유명한 승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원래의 비신이 남아있지 않아 주인공을 알 수 없다.
발을 내밀어 웅크리고 있는 자세의 귀부는 방형의 받침돌과 한 돌로 만들어졌다. 얼굴은 부리부리한 눈과 굵은 눈썹이 강조되어 있고, 입가에 지느러미와 수염 등이 표현되어 있다. 등에는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등 가운데 비를 세우는 비좌는 구름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이수에는 용과 구름 문양이 가득하다. 앞면 가운데 있는 사등분된 사각형 모양의 제액(題額)은 원래 비의 이름을 새기는 곳인데, 새긴 글자가 없어 비석의 주인공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