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만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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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이 건물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학문을 하던 곳으로 조선 고종(高宗) 22년(1855)에 건립된 정자이다. 현판은 대원군(大院君)의 친필이다. 원래 임하면 사의동에 위치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8년 이 곳으로 이전하여 보수하였다.

정자는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는데, 좌측을 통칸방으로 꾸미고 우측 2칸에는 우물마루를 놓았다. 기둥은 둥근 것과 네모난 것을 혼용하였는데 대청부분을 강조한 집으로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이 건물은 5량가로 동자(童子)형태의 대공(臺工)을 세운 장식성이 없는 간결한 구조이며, 소박한 정자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시대 문신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1857년(철종 8)에 강학공간으로 건립한 정자이다.

류치명의 본관은 전주이고 1805년(순조 5)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853년(철종 4) 병조 참판이 되었다. 1855년(철종 6)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고 7월에 유배된 뒤 그 해 11월에 석방되었다. 1857년 그의 문인들이 지어준 만우정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고, 1861년에 별세하였다. 그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학통을 계승하여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문인인 이원조(李源祚, 1792-1871)가 쓴 현판 외에도 당대 글씨로 유명했던 신헌(申櫶, 1810-188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등이 쓴 현판이 있다. 원래 임하면 사의동에 위치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8년 이 곳으로 이전하여 보수하였다.

정자의 이름을 ‘만우(晩愚)’라고 지은 것은 여든 넘은 나이에 정자를 지어 풍경도 늦고 계책도 늦었으니 스스로를 비웃는 뜻을 깃들이고자 해서이다.

1차 수정

만우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1857년에 강학공간으로 건립한 정자이다. 원래 임하면 사의동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1988년에 이곳으로 옮겨 보수하였다.

류치명은 1805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53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1855년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고 7월에 유배된 뒤 그 해 11월에 석방되었다. 1857년 그의 문인들이 지어준 만우정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 1502~1570)의 학통을 계승하여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고 여러 저술을 남겼다.

정자의 이름을 ‘만우(晩愚)’라고 지은 것은 여든 넘은 나이에 정자를 지어 풍경도 늦고 계책도 늦었으니 스스로 어리석다고 비웃는 의미이다. 정자 안에는 류치명의 제자인 이원조(李源祚, 1792~1871)가 쓴 현판 외에도 당대 글씨로 유명했던 신헌(申櫶, 1810~188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등이 쓴 현판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