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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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정
Manujeong Pavilion, Andong
만우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만우정
영문명칭 Manujeong Pavilion, Andong
한자 晩愚亭
주소 경북 안동시 임하면 수곡리 산44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호
지정(등록)일 1985년 8월 5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만우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만우정은 조선 시대 때 문신이었던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학문을 연구하던 정자이다. 1857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황의 학풍을 계승한 류치명은 180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53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1855년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고 7월에 유배된 뒤 그 해 11월에 석방되었다.

만우정의 ‘만우’는 늦은 나이에 정자를 지어 풍경도 늦고 계책도 늦었으니 스스로 어리석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래 임하면 사의동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198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손보아 고쳤다.

건물 크기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자 안에는 류치명의 제자인 이원조(李源祚, 1792~1871)가 쓴 현판 외에도 당대 글씨로 유명했던 신헌(申櫶, 1810~188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등이 쓴 현판이 남아 있다.

영문

Manujeong Pavilion, Andong

This pavilion was built in 1857 to be used as a lecture hall by Ryu Chi-myeong (1777-1861),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Ryu Chi-my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805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 1853, he became minister of military affairs. In 1857, his followers built this pavilion for him, and he spent his remaining life here teaching students and composing written works.

This pavilion was originally located in a nearby village, but it was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and repaired in 1988 when the Imha Dam was constructed.

The name Manujeong means “Pavilion of the Late Fool” and is a form of self-mockery over the fact that Ryu was too late in having a pavilion built, as he was already 80 at the time.

There are wooden plaques hanging in the pavilion which were calligraphed by eminent literati, such as Yi Won-jo (1792-1871), who was one of Ryu’s followers, Sin Heon (1810-1884), and Heungseon Daewongun (1820-1898), the father and regent of King Gojong (r. 1863-1907).

영문 해설 내용

만우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1857년에 강학공간으로 건립한 정자이다. 원래 임하면 사의동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1988년에 이곳으로 옮겨 보수하였다.

류치명은 1805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53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1855년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고 7월에 유배된 뒤 그 해 11월에 석방되었다. 1857년 그의 문인들이 지어준 만우정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 1502~1570)의 학통을 계승하여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고 여러 저술을 남겼다.

정자의 이름을 ‘만우(晩愚)’라고 지은 것은 여든 넘은 나이에 정자를 지어 풍경도 늦고 계책도 늦었으니 스스로 어리석다고 비웃는 의미이다. 정자 안에는 류치명의 제자인 이원조(李源祚, 1792~1871)가 쓴 현판 외에도 당대 글씨로 유명했던 신헌(申櫶, 1810~188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등이 쓴 현판이 남아 있다.

참고자료

  • 김지은, 「정재 류치명의 문인록과 문인집단의 분석」, 『조선시대사학보』 85, 조선시대사학회, 2018.
  • 『晩愚亭約案』

→ 위의 자료를 통해 만우정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그의 문인들이 1857년(철종 8)에 강학공간으로 건립하였다.

  • 『승정원일기』 철종 6년 7월 26일 정해.
  • 『철종실록』 권7, 철종 6년 4월 2일 갑오; 철종 6년 11월 6일 을축.

→ 위의 기사를 통해 류치명이 유배된 배경 및 날짜, 석방된 날짜를 확인할 수 있다.

→ 만우정 현판과 관련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는 이원조가 현판을 썼다고 되어 있고, 기존 국문에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되어 있는데 확인 결과 현판이 여러 개 였음을 알 수 있다.

  • 『定齋集』 卷2, <晩愚亭記>

→ 만우정이라 이름 지은 뜻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