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해 양동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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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기원전 2세기대로부터 기원 5세기대에 걸쳐 형성된 고분군으로서, 발굴조사 결과 다양한 묘제와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 국가 형성기로부터 발전기의 역사적 사실을 한 눈에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유적은 일찍부터 김해지역 중심고분유적의 하나로 주목받은 곳으로서 1984년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래 1990~1996년간 동의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4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등 548기의 유구와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 5,100여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확인된 유구는 묘제의 변천과정과 연대 규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출토된 각종 유물은 시기별 가야문화의 실상과 변화상을 한 눈에 보여줄 뿐만 아니라 종래의 연구에서 부족했던 많은 자료를 보완하여 국제성을 띤 가야문화의 세련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발굴성과를 통하여 가야사회의 문화와 국가·사회적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구야국(狗倻國) 또는 본가야(本伽倻)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하여 번성한 해양왕국(海洋王國)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2세기 후반에서 4세기까지가 가야철(伽倻鐵)의 전성기로서 해상활동도 가장 활발하여 외래문물도 해로를 통해 직접 유입되었던 가야시대의 번성기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철생산이 가야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은 동시에 철시장의 상실로 인한 가치 하락이 가야 쇠퇴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새롭게 부상한 신라나 백제의 압박으로 점차 쇠망하였다는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이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그 발굴 성과를 통해 각 시기별 가야문물의 진수를 보여줄 뿐 아니라 낙동강 하류 지역 가야 사회의 성장과 그 국가적 성격을 밝히는 귀중한 유적이라 할 것이다.

수정 국문

초고

양동리 고분군은 기원전 2세기 말부터 7세기 사이에 형성된 유적으로, 이곳을 통해 가야의 성립과 발전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 고분군에 대해서는 198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를 시작으로 동의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 5차례와 국립김해박물관과 대성동고분박물관의 공동발굴조사, 해동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이루어진 말단부에 대한 조사 등 총 8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등 6종류의 유구 548기와 다양한 무기류와 농기구류,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 5,100여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고, 추가로 이루어진 조사에서 49기의 유구가 더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확인되는 유구들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가장 늦은 시기의 7세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다. 특히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 사이에 공백 없이 지속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중심 유적지 외곽으로 확장되는 양상도 확인할 수 있다. 일부 유구에서는 묘실 내부를 태우는 특수한 장례의식의 흔적도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가야 묘제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일부 유구에서는 묘실 내부를 태우는 특수한 장례의식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은 종래의 연구에서 부족했던 가야의 형성 및 발전에 관련된 자료를 보완하였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가야의 지배층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있는 철기 자료들은 낙동각 하류 김해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가야가 우수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정복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2세기 후반에서 4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맞이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국제교역으로 유입된 물품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청동기는 해로를 통한 교역 과정에서 외래 문물을 직접 유입했던 해양왕국(海洋王國) 가야의 국제적 성격을 확인하게 한다.

  • 이 곳에서 출토된 장신구류의 형태는 중국 역사서에 언급된 가야 관련 기사에 부합된다.(국제성..?)
  • 피장자가 제사장(천군)으로 추정되는 본분(55호분)을 통해 당시 가야의 정치 상황도 유추해볼 수 있다. 길이 5m 이상의 대형 덧널무덤의 조성시기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으며(162호), 4세기 중엽 이후 돌덧널무덤으로 묘제가 발전하는 양상도 확인할 수 있다.
  • 출토된 철기 자료들은 정복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2세기 후반에서 4세기 사이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전성기를 맞았던 가야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차 수정

양동리 고분군은 기원전 2세기 말부터 7세기 사이에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유적이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등 6종류의 유구 548기와 다양한 무기류와 농기구류,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 5,1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고, 추가로 이루어진 조사에서 49기의 유구가 더 발견되었다.

일부 무덤에서는 묘실 내부를 태우는 특수한 장례의식의 흔적도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가야 묘제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청동기는 국제교역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해로를 통한 교역 과정에서 외래 문물을 직접 유입했던 해양왕국(海洋王國) 가야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농기류->농공구류
    • 발굴된 매장시설의 종류와 수량 최신 자료로 업데이트 요망 (2014년 해동문화재연구원 조사까지 628기)
    • 의의 추가 -> 널무덤부터 돌방무덤까지 모든 종류의 무덤이 발굴되어 가야의 무덤 변천 과정을 파악하는데 최적의 자료를 제공한다.
    • 청동기의 종류 추가: 청동거울, 청통솥 등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양동리 고분군은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기원 후 5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7세기의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유적이다.
    •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널무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등의 유구 약 600기와 다양한 무기류와 농기구류,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 5,1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 양동리 고분군의 조사 결과 변한에서 가야에 이르는 무덤의 변천 모습과 구야국에서 금관가야로의 발전 과정과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계 유물 뿐만 아니라 청동거울, 청동세발솥, 청동솥, 쇠솥 등의 중국계, 본뜬거울, 청동창, 토기 등의 왜계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다양한 외래 유물들은 해양왕국(海洋王國) 가야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추가로 이루어진 조사’가 불필요해보임. 애초에 어디에서 추가되었는지가 불명확해 이 문장을 덧붙이는 의미를 명기해주거나 의미없다면 삭제
    •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등 6종류의 유구 597기와 다양한 무기류와 농기구류,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 5,1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2차 수정

양동리 고분군은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기원 후 5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7세기의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유적이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널무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등의 유구 600여 기가 확인되어, 변한에서 가야에 이르는 무덤의 변천 모습을 파악하는 데 최적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청동거울, 청동세발솥, 청동솥, 쇠솥, 청동창,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청동기는 중국과 왜 등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해로를 통한 교역 과정에서 외래 문물을 직접 유입했던 해양왕국(海洋王國) 가야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