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공주 계룡산 중악단
목차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중악단은 국가에서 계룡산 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상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쌓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구릉지에 동북 ‧ 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에 단묘(壇廟)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없어지고 중악단만 보존되어 있어,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중악단은 신원사 대웅전 오른쪽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일종의 산신각으로, 국가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건축물이다.
1394년(태조 3), 무학대사의 꿈에 신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계룡산의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이라는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1651년(효종 2)에 이 단이 폐지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명성황후의 명으로 재건되었다. 이때 북쪽의 모향산과 남쪽의 지리산 산신각을 각각 상악단(上嶽壇)과 하악단(下嶽壇)이라 한 데에 기인하여 두 산의 사이에 있는 계룡산 산신각을 중악단(中嶽壇)이라 개칭하였다.
구릉지에 동북·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에 단묘(壇廟)*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묘향산의 상악단과 지리산의 하악단이 현재 남아있지 않은 것에 비해 중악단은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 제단은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3월 2일에 해제되었다. 그 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되었고, 신원사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 단묘 : 단묘(壇廟)는 조선 시대에 제사를 지내던 각종 제단과 사당을 지칭한다. [향토문화전자대전]
- 산신은 원래 산하대지(山河大地)의 국토를 수호하는 신이며 산신제는 민족정기의 고양과 모든 백성의 합일(合一) 및 번영을 기원하던 팔관회(八關會)를 후에 기우제, 산신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초고 수정
중악단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계룡산의 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건축물로, 현재 신원사 대웅전 오른쪽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계룡산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조선 태조 3년(1394)부터로,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꿈에 신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계룡산의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이라는 단을 쌓은 후 제사를 올린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효종 2년(1651)에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의 명으로 재건하고 중악단(中嶽壇)이라 개칭하였다. 이는 계룡산이 상악단(上嶽壇)이 있었던 북쪽의 모향산과 하악단(下嶽壇)이라 불렸던 산신각이 있었던 남쪽의 지리산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구릉지에 대문간채, 중문간채, 사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했으며,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사라졌다. 그렇기에 이곳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적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1차 수정
중악단은 조선시대에 계룡산 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건축물이다.
계룡산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은 조선 태조 3년(1394)부터라고 전해진다.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꿈에 신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계룡산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이라는 단을 쌓은 후 제사를 올린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효종 2년(1651)에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의 명으로 재건하고 중악단(中嶽壇)이라 개칭하였다. 이는 계룡산이 상악단(上嶽壇)이 있던 북쪽의 모향산과 하악단(下嶽壇)이 있던 남쪽의 지리산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사라졌고,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산신에게 제사 지냈던 유적으로는 중악단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대문간채, 중문간채, 본전(本殿)을 일직선상에 배치했으며, 중문채와 본전 사이에 돌과 벽돌을 깔아 신도(神道)를 조성하였다. 본전 안에는 계룡산 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셨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없음.
- 분야별 자문위원 2
- 문화재명 한자 수정 요망 : 공주 계룡산 중악단 公州 李惟泰 遺墟地 -> 공주 계룡산 중악단 公州 鷄龍山 中嶽壇
-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사라졌고,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산신에게 제사 지냈던 유적으로는 중악단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 첫 문장과 중복되므로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사라지고, 중악단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로 수정 요망.
- 대문간채, 중문간채, 본전(本殿)을 일직선상에 배치했으며, -> 중악단의 건물은 대문간채, 중문간채, 본전(本殿)을 일직선상에 배치했으며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내용상 제사를 지내다가 폐지 했다가를 반복했다는데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 할 듯 합니다. 간략하게나마 첨가해 주면 더 좋을 듯합니다.
- 이 유적은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강조할수 있는 문장이 첨가 돼야 할 듯 합니다. 조선후기 왕실 주도로 건축되어 궁궐 건축 양식과 기법이 가미된 건축물로 건축사적으로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이 문화재의 의미가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산신에게 제사 지냈던 유적으로는 중악단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산신에게 제사 지낸 유적으로는 중악단이 유일하다.
2차 수정
중악단은 조선시대에 계룡산 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건축물이다.
계룡산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은 조선 태조 3년(1394)부터라고 전해진다.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꿈에 신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계룡산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이라는 단을 쌓은 후 제사를 올린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효종 2년(1651)에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의 명으로 재건하고 중악단(中嶽壇)이라 개칭하였다. 이는 계룡산이 상악단(上嶽壇)이 있던 북쪽의 모향산과 하악단(下嶽壇)이 있던 남쪽의 지리산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사라졌고, 중악단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중악단의 건물은 대문간채, 중문간채, 본전(本殿)을 일직선상에 배치했으며, 중문채와 본전 사이에 돌과 벽돌을 깔아 신도(神道)를 조성하였다. 본전 안에는 계룡산 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