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고성 어명기 고택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처음 건축 연대는 1500년대이며, 1750년 화재를 당하여 3년에 걸쳐서 재건축하였고, 현 주인의 조부가 1860년 경에 구입하였다.
남남서향의 집터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앞줄의 3칸 전체에 마루를 완전히 갖춘 세줄 겹집의 특이한 평면 구조이다. 안방, 윗방, 가운데방의 3칸을 평천정으로 마감하고 대들보 위의 공간을 개방하여 저장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몸체 부엌의 앞쪽으로는 한 칸을 돌출시켜 아래는 외양간으로, 위는 물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기와기붕 형식이며 5량구조로, 훈련된 목수에 의해 당당한 재목을 사용하여 가옥 전체를 건축하였다. 본채의 뒷마당에는 3칸의 곳간이 있으며, 부엌 측면 마당에 방앗간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앞마당 입구에 옮겨져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16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29년(1753)에 다시 지었다고 하며, 어명기의 조부 어용수가 철종 11년(1860) 경에 구입하였다.
경사진 언덕에 자리한 집터에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지 않고 한 건물에 시설한 몸채가 있고, 서쪽에 행랑채, 뒤쪽에 곳간채를 두었다. 앞마당 입구에 있는 방앗간은 원래 몸채 왼쪽에 있었는데, 1996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ㄱ’자형 평면의 몸채는 중앙에는 온돌방과 대청이 있다. 왼쪽에는 판자벽을 두른 부엌과 외양간이, 오른쪽에는 사랑채 영역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는 구조이다. 외양간은 부엌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위에는 다락을 꾸며 수납공간을 만들고, 부엌과 외양간 사이에 뒤주를 붙여 곡식을 저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로로 구획된 사랑채 영역 중 가장 앞에 있는 방은 주인의 거처이고, 뒤쪽 방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각 방들에는 천장과 지붕 사이를 터서 만든 공간인 ‘더그매’가 있다. 더그매는 물건을 넣어두는 보관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며, 통풍과 환기를 도와주고 지붕으로부터 내려오는 한기를 막는 등 환경조절에 도움을 준다.
이 집은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 때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한국전쟁 때는 국군의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집은 특히 툇간에 해당하는 자리에 마루를 깔아 대청 용도로 사용하는 세 줄 겹집 구조로서 학술적 가치가 있다.
- 1996년 4월 23일 산불로 디딜방앗간과 화장실이 소실되었다가 복원되고, 1997년 별채를 해체·복원하였다.
- 북방식 양통집구조(ㄱ 자형 겹집구조) 그대로 보존된 남한의 유일한 곳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은 민속자료입니다.
1차 수정
어명기 고택은 1500년대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하는 전통 상류 주택이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영조 26년(1750)에 다시 지었고, 현 주인인 어명기의 할아버지 어용수가 철종 11년(1860) 무렵 구입하였다. 이 집이 위치한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는 함종어씨 가문이 대대로 사는 마을이다.
경사진 언덕에 자리한 이 집은 몸채, 행랑채, 곳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전통 가옥은 여성과 남성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를 별도의 건물로 만드는데, 이 집에서는 안채와 사랑채가 몸채 한 건물에 같이 있다. 특히 기본적인 겹집 앞면에 1칸을 더 붙여 세줄 겹집을 만든 독특한 평면 구성을 보여준다.
몸채는 왼쪽부터 부엌과 외양간, 안채에 해당하는 대청과 안방·건넌방, 사랑채에 해당하는 마루방과 사랑방이 있다. 몸채 정면 왼쪽에 돌출된 부분이 외양간이다. 외양간 위에는 다락을 꾸며 수납공간을 만들고, 부엌과 외양간 사이에 뒤주를 붙여 곡식을 저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사랑방 중 앞의 것은 이 집 남자 주인의 거처이고, 뒤쪽 방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각 방의 천장과 지붕 사이에는 ‘더그매’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다. 더그매는 수납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통풍과 환기를 도와주고 지붕으로부터 내려오는 한기를 막는 등 환경조절에 활용되기도 한다.
앞마당 입구에 있는 방앗간은 원래 몸채 왼쪽에 있었으나, 1996년 불에 탄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