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고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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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서원은 18세기 유학자인 문경공(文敬公)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상정은 25세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참의에 제수 되었으나 사퇴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조선 고종(高宗) 19년(1882)에 이조판서에 올려졌고 1910년에 문경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건물로는 사당인 경행사(景行祠)와 강당인 호인당(好仁堂)이 있고 오른쪽에 ‘口’자형 관리사가 있다. 앞에서 왼편으로는 고산정사(高山精舍)가 있다. 경행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고, 호인당은 온돌방 2칸과 8칸의 마루가 있어 그 규모가 크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동․서재인 앙지재와 백승재의 양 끝은 개방된 마루가 있어서 주변의 경관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고산서원은 조선시대의 학자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정조 13년(1789)에 세워졌다.

이상정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 이황(李滉, 1502~1570)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로, 벼슬을 사양하면서 고향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것에 힘썼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이상정이 영조 44년(1768)에 건립한 고산정사(高山精舍)가 있었는데, 후대에 지역 유림들이 그의 행적을 추모하며 그 터에 서원을 짓고 학문을 익히는 공간으로 삼은 것이다. ‘고산’은 『시경(詩經)』의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고상하고 숭고한 덕행’을 뜻한다. 서원 내의 다른 건물의 이름 역시 『시경』 구절에서 따서 지었으며, 이상정의 학덕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원은 강학을 위한 강당이 앞에 있고, 제향 공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경내에는 1977년 정비된 고산정사(高山精舍)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제사 준비를 위한 전사청, 관리인이 머무는 주사 등 총 9동의 건물이 있다.

서원은 고종 5년(1868)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어 향사만 지내다가, 1977년부터 복원을 시작했다. 1985년에는 이상정의 동생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을 추가로 배향했고, 이후 매년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高山仰止 景行行止 : 높은 산을 보고 큰 도를 행한다(시경 소아 차할편)

1차 수정

고산서원은 조선시대의 학자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정조 13년(1789)에 세워졌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상정은 한산이씨 집성촌인 안동 망호리 출신이다. 영조 11년(1735)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학문을 계승하며 제자를 길러내는 데 힘썼다. 서원의 이름인 ‘고산’은 『시경(詩經)』에서 ‘높은 산을 보고 큰 도를 행한다(高山仰止 景行行止)’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이상정의 ‘고상하고 숭고한 덕행’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산서원 왼쪽에는 이상정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영조 44년(1768)에 세운 고산정사(高山精舍)가 있다. 이상정이 세상을 떠난 후 지역 유림들이 그의 행적을 추모하기 위해 정사 옆에 서원을 세웠으나,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지금의 서원은 1977년부터 새로 지은 것이다. 1985년에는 이상정의 동생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을 추가로 모셨다.

서원은 앞쪽에서부터 정문,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강당, 내삼문,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 오른쪽에는 제사 준비를 위한 전사청이 있고, 강당 오른쪽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주사가 있다. 고산정사는 1977년 서원을 새로 지을 때 함께 정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