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거제 장목진 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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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거제는 왜구의 침략이 심하여 조선 초기에 7개 군진軍鎭을 설치하였는데 장목진은 그 중의 하나이다. 이 객사客舍는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본래 장목리長木理 동구東區에 있었던 것을 1592년(선조 25)에 서구西區로 옮겨와 지은 것이라 한다. 지금의 객사는 1785년(정조 9)에 중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1914년부터 1953년까지는 장목면長木面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객사란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묵는 숙소이자, 건물의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공간이다. 따라서 출장중인 관리나 수령은 반드시 이곳에 들러 임금의 전패殿牌에 절을 올려야 했다. 곧 객사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지방 공공시설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의 장목 객사는 겨우 담장과 출입문으로 외부와 경계를 이루었고, 부속건물도 없이 본채만 덩그러니 남아, 위풍당당한 왕조의 권위는 사라져 버렸다. 또 기둥도 외곽만 둥근 배흘림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각진 기둥을 써 일반 가정집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다만 막돌로 1m 가 넘게 쌓은 석축만이 옛 영화를 전해준다. 이곳 장목진은 거제의 북쪽 끝에 위치한 관계로, 진해만 일대를 방어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전략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장군은 옥포전투玉浦와 칠천漆川전투를 앞두고 이곳에서 전략을 논의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거제부 소속 7개 진영 중의 하나였던 장목진(長木鎭) 관아의 부속 건물이다.

객사는 조선시대에 고을 관아에 설치한 건물로서 가운데에 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이 있고 좌우 양쪽에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이 있다. 객사에 모셔진 전패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고을 수령과 관리들은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했다.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발생한 선조 25년(1592)에 동구에 건립하였던 것을 서구로 옮겼다고 한다. 건물이 세워져 있는 이 자리는 진해를 마주보는 거제도의 북단에 위치한 곳으로 진해항일대를 방어하고 대한해협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유인, 척결하는데 좋은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곳은 항시 수군들이 전략을 세우고, 상륙하여 주둔하던 객사로 사용되어 왔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이영남(李英男, 1563~1598)이 거제 옥포해전과 칠천해전의 전략을 세웠던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객사는 정조 9년(1785) 어모장군 이진국(李珍國)이 중건하였으나, 순조 2년(1802)에 다시 중수하여 조선 후기 건물의 형식을 띠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81~1982년에 다시 복원한 것으로, 건물의 양쪽에 방이 있고 가운데에 장수가 업무를 보던 넓은 대청이 있어 객사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1차 수정

거제 장목진 객사는 거제부에 소속된 7개 진영 중 하나였던 장목진 관아의 부속 건물이다.

객사는 조선시대에 고을 관아에 설치한 건물로서 가운데에 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이 있고 좌우 양쪽에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이 있다. 객사에 모셔진 전패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고을 수령과 관리들은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했다. 장목진에 객사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원래 동구에 건립하였던 것을 선조 25년(1592) 서구로 옮겼다고 한다.

장목진은 진해를 마주 보는 거제도의 북단으로 진해항 일대를 방어하고 대한해협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유인, 척결하는데 좋은 군사적 요충지이다. 장목진의 객사는 수군들이 전략을 세우고, 상륙하여 주둔하는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이영남(李英男, 1563~1598)이 거제 옥포해전과 칠천해전의 전략을 세웠던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의 장목진 객사는 1981~1982년에 복원한 것이다. 건물의 양쪽에 방이 있고 가운데에 장수가 업무를 보던 넓은 대청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1. “가운데에 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이 있고 좌우 양쪽에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이 있다.”/“건물의 양쪽에 방이 있고 가운데에 장수가 업무를 보던 넓은 대청이 있다.”→안내문의 내용이 상호 괴리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수정이 필요하다. 가운데 정청의 지붕이 높고 양쪽 익사의 지붕이 낮은 객사의 보편적 구조에서 벗어나는 건물임을 안내할 필요가 있다.
    • 2. “1981~1982년에 복원한 것이다.”→완전히 소실된 건물을 복원 개념으로 중건한 것인지, 기존의 노후하거나 변형된 건물을 해체복원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3. 구 문안의 “지금의 객사는 1785년(정조 9)에 중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1914년부터 1953년까지는 장목면(長木面)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가 연혁을 잘 정리한 표현이라고 생각됨.
  2. 분야별 자문위원 2
    • 거제 장목진 객사는 거제부에 소속된 7개 진영 중 하나였던 장목진 관아의 부속 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집이다. 객사는 조선시대에 고을 관아에 설치한 건물로서 가운데에 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이 있고 좌우 양쪽에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이 있다. 객사에 모셔진 전패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고을 수령과 관리들은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했다. 장목진에 객사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원래 동구에 건립하였던 것을 선조 25년(1592) 정조 9년(1785)에 서구로 옮겼다고 한다.
    • 장목진은 진해를 마주 보는 거제도의 북단으로 진해항진해만 일대를 방어하고 대한해협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유인, 척결하는데 좋은 군사적 요충지이다. 장목진의 객사는 수군들이 전략을 세우고, 상륙하여 주둔하는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이영남(李英男, 1563~1598)이 거제 옥포해전과 칠천해전의 전략을 세웠던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 현재의 장목진 객사는 순조 2년(1802)년에 다시 중수한 건물로 1981~1982년에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건물의 양쪽에 방이 있고 가운데에 장수가 업무를 보던 넓은 대청이 있다.
    •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민족대백과사전 등에는 서구로 옮긴 해를 정조 9년(1785)으로 하고 있다. 건물 소개가 필요하며, 1981~1982년에 복원한 것이 아니라 이전 건물을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1.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조선시대라는 게 첫 문장에 나오는 게 더 나을 듯 합니다. 문화재의 시기를 빨리 인지하면 이해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거제 장목진 객사는 거제부에 소속된 7개 진영 중 하나였던 장목진 관아의 부속 건물이다.’=>거제 장목진 객사는 조선시대 거제부에~
    • 대신 두 번째 문장의 ‘조선시대에’는 빼도 무방.
    • 기본문안의 ‘객사란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묵는 숙소이자, 건물의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공간이다.’는 부분은 살렸으면 합니다. 이어서 ‘객사에 모셔진 전패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로 이어지는게 더 나을 듯 합니다. 왜냐면 객사는 관원들의 숙소라는 기본 성격이 명확히 표현돼야지 그저 관아의 일부라는 표현은 너무 두루뭉술합니다.
    • 장목진의 객사는 수군들이 전략을 세우고, 상륙하여 주둔하는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장목진 객사는 수군들이 주둔하여 수뇌부인 장수들이 전략을 모의 하고 의논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객사에서 벌어지는 일이 좀더 명확하게 와닿았으면 해서 문장을 바꿔서 강조했으면 합니다)

2차 수정

거제 장목진 객사는 조선시대 거제부에 소속된 7개 진영 중 하나였던 장목진 관아의 부속 건물이다.

객사는 고을 관아에 설치한 건물로,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묵는 숙소이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던 곳이다. 객사는 왕의 통치권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었으며, 고을 수령과 관리들은 객사에서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했다. 일반적으로 객사 가운데에는 전패를 모시는 정당이 있고 좌우 양쪽에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이 있다. 장목진에 객사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원래 동구에 건립하였던 것을 정조 9년(1785) 서구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의 장목진 객사는 순조 2년(1802)에 다시 중수한 건물로 1981~1982년에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장목진은 진해를 마주 보는 거제도의 북단으로 진해만 일대를 방어하고 대한해협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유인, 척결하는데 좋은 군사적 요충지이다. 장목진의 객사는 수군들이 주둔하여 장수들이 전략을 모의하고 의논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이영남(李英男, 1563~1598)이 거제 옥포해전과 칠천해전의 전략을 세웠던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