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전리 각석 명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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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각석 명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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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천전리 각석 명문 해설

울주 천전리 각석과 명문

천전리 각석은 높이 2.7미터, 너비 9.5미터정도 되는 바위에 선사시대 그림과 신라 때의 글씨 및 그림이 새겨진 것이다. 각석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위 중간부분 아래쪽에 있는 을사명(원명, 525년)과 기미명(추명, 539년)에 새긴 글씨이다. 525년에 새긴 글씨(을사명)는 가장 오래된 신라 명문의 하나이다.

명문을 주목할 때, 이를 ‘천전리 서석(川前里 書石)’이라 부르며, 6세기 전반에 신라 왕족이 이곳에 행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을사명(원명) 주요 부분

乙巳
沙喙部葛
文王覓遊來.始·見谷·
之.古谷无名谷.善石淂造(書).
△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麗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을사년에 사탁부의 갈문왕이 찾아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도
이름이 없는 골짜기였다.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새기고
이하에는 서석곡이라 이름하고 글자를 지었다.
함께 논 벗은 매(妹)인 아름다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여랑님이다.

기미명(추명) 주요 부분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
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女郞
王.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
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
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 妹共見書石
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
支妃.徙夫知王子郞深△夫知共來.此時△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과 매인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온 이후 △년을(?)사년(?)이 지나갔다. 매왕(妹王)을
생각하니 매왕은 죽은 사람이다.
정사년(537)에는 (사부지)왕이 죽었다.
그 왕비인 지몰시혜비가 (사부지)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셔
기미년 7월 3일 (갈문)왕과 매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이때 함께 셋이 왔는데,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사부지왕자인 랑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천전리 각석 명문은 6세기 신라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

  1. 천전리 각석 명문의 사료적 가치
    • 각석 명문은 신라왕실 구성원 존재 양상·부(部)·갈문왕·왕권 강화·여성 지위 등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중고기(법흥왕~진덕여왕까지, 520~654) 신라 정치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사료이다.
  2. 왕실 소속부
    • 천전리 각석 명문을 비롯한 6세기 초반 금석문에서 보면, 국왕인 법흥왕은 탁부(양부),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은 사탁부(사량부) 소속이다. 신라 왕실은 탁부와 사탁부에 속하였는데, 이를 2부 체제라 일컫기도 한다.
  3. 갈문왕(葛文王) 제도
    • 갈문왕도 ‘왕(王)’으로 표기하였으며, 갈문왕 부인인 지몰시혜도 ‘왕비(王妃)’라 불렸다. 갈문왕은 국왕과 비견되어 일반 신하와는 다른 존재였다.
    • 갈문왕은 신라 초기에 다른 족단의 우두머리에게 주는 지위였으나, 4세기 후반에 김씨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김씨 족단 내의 인물인 왕의 동생이 갈문왕을 주로 차지하였는데, 법흥왕대까지 그런 관행이 이어지고 있었다.
  4. 왕호의 변화
    • 신라의 왕호는 520년대까지 매금왕[울진봉평비(524년)-‘탁부 모즉지매금왕(喙部 牟卽智寐錦王’)]이었으나, 530년대에는 대왕(大王), 태왕(太王)으로 격상되었다. 천전리 각석의 535년(을묘명) 명문에서 법흥왕은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539년(기미명) 명문에는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 이라 하여 신라 국왕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나타낸다.
  5. 진흥왕(540년~576년)의 활동
    • 진흥왕은 법흥왕에 이어 7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태후인 지몰시혜비(지소부인)가 진흥왕이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 551년까지 섭정한 것으로 보인다.
    • 진흥왕은 545년 거칠부에 명하여 국사(國史)를 편찬했고, 553년 한강유역 점령, 562년 가야를 정복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였다. 진흥왕은 새로 확보한 영토를 순수하고 서울 북한산, 함경도 원산의 황초령·마운령에 각각의 순수비(巡狩碑)를 세웠으며, 화랑도 창설, 흥륜사 준공, 황룡사 창건 등의 업적을 남겼다.

영문

Petroglyphs and Inscriptions of Cheonjeon-ri, Ulju

Distributed over a flat rock face measuring 9.5 m in width and 2.7 m in height are carved images and patterns from the Bronze Age and inscriptions and carved images from the Silla period. Among the roughly 250 written inscriptions, the two most noteworthy ones, located near the middle bottom of the rock, record the visits to this place by members of the Silla royal family in 525 and 539. The record of 525 is one of Silla’s earliest extant stone inscriptions.

Excerpt from the Inscription of the Year 525

乙巳
沙喙部葛
文王覓遊來.始·見谷·
之.古谷无名谷.善石淂造(書).
△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麗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In the eulsa year [525], Galmunwang [Prince Sabuji] of the Satak-bu District came here looking for enjoyment and saw the valley for the first time. The old valley was a nameless valley. He obtained a good rock, below which he inscribed the name Seoseokgok [“Valley of the Inscribed Rock”]. Enjoying this together was his friend and sister, the beautiful, virtuous, bright, and enigmatic Lady Eosachu.

Excerpt from the Inscription of the Year 539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
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女郞
王.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
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
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 妹共見書石
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
支妃.徙夫知王子郞深△夫知共來.此時△

In the past, on the morning of the eighteenth day of the sixth month of the eulsa year [525], Sabuji Galmunwang of the Satak-bu District and his sister Lady Eosachu enjoyed this place together. Since then, [??] years have passed. As for the sister, she has passed on. In the jeongsa year [537], Galmunwang passed on. Galmunwang’s consort Lady Jimolsihye still thought herself in love, so on the third day of the seventh month of the gimi year [539], she came to the valley to see the rock inscribed by Galmunwang and his sister. At the time, three people came, including Lady Bugeolji, the consort of Mujeukji Taewang [King Beopheung, r. 514-540], and Simmaekbu, the son of Galmunwang.

The Cheonjeon-ri Inscriptions as Historical Records: Shedding Light on Silla’s Sociopolitical System in the 6th Century

  1. Historical Value of the Cheonjeon-ri Inscriptions
    • These inscriptions provide valuable information on several sociopolitical aspects of life in Silla during the 6th-7th centuries, which includes the structure of the royal court, the status of the administrative unit bu (“district”) in Silla’s capital, the nature of the title Galmunwang, the consolidation of the king’s authority, and the status of women.
  2. The Structure of Royal Court
    • The six administrative districts of Silla’s capital represented separate political entities or factions that ruled the kingdom. According to the 6th-century inscriptions from Silla, King Beopheung and his younger brother Prince Sabuji (Galmunwang) belonged respectively to the Tak-bu and Satak-bu Districts. These districts eventually consolidated power and weakened the position of the other four districts, effectively forming a two-faction government system.
  3. The Title of Galmunwang
    • Across Silla’s history, the royal title Galmunwang of was used in reference to the king’s father, father-in-law, younger brother, or other male relatives. The precise meaning of the title remains unknown.
    • In the early years of the kingdom, the selection of a king was done on a rotation principle between three dominant clans: Bak, Seok, and Kim. The title Galmunwang was given to the heads of the clans that were not the clan of the ruling king. In the late 4th century, the Kim clan strengthened its power and established a hereditary crown inheritance system. At the time, the title Galmunwang was mostly granted to the king’s younger brother. This practice continued until the reign of King Beopheung (r. 514-540).
  4. The Change of Kingship Titles
    • The term maegeum, meaning “great chief,” had been used since the late 4th century to refer to Silla’s rulers. However, beginning in the 530s, titles such as daewang or taewang, meaning “great king,” were introduced. In fact, King Beopheung is referred to as Seongbeopheung Daewang in the 535 inscription but Mujeukji Taewang in the 539 inscription, suggesting that the status of kingship itself had undergone certain changes.
  5. The Achievements of King Jinheung
    • King Jinheung (r. 540-576), the son of Prince Sabuji (i.e. Galmunwang), ascended to the throne at a young age. Until 551, his mother Lady Jimolsihye acted regent. During the reign of King Jinheung, the kingdom’s territory underwent unprecedented expansion, which laid the foundation for the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under Silla rule.
    • King Jinheung’s major achievements include the compilation of National History (Guksa) and the great support of Buddhism, including the construction of Heungnyunsa and Hwangnyongsa Temples. His newly conquered lands included the former Gaya Confederacy and stretched all the way to the basin of the Hangang River and the present-day Hamgyeongnam-do region. Steles commemorating the king’s visit to the new parts of his domain were installed on Bukhansan Mountain in Seoul as well as Hwangchoryeong and Maullyeong Passes in Wonsan, North Korea. King Jinheung also established an elite male youth institution, known as the Hwarangdo, to train elite warriors.

영문 해설 내용

천전리 각석 명문 해설

울주 천전리 각석과 명문

천전리 각석은 너비 9.5m, 높이 2.7m 정도 되는 바위에 청동기시대 그림과 신라 때의 글씨 및 그림이 새겨진 것이다. 바위 곳곳에 새겨진 250여 개의 명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위 중간 부분 아래 쪽에 있는 2개의 명문으로 각각 525년과 539년에 신라 왕족이 이곳에 행차했음을 기록하였다. 525년의 명문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신라 명문 중 하나이다.

천전리 각석 명문은 6세기 신라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

  1. 천전리 각석 명문의 사료적 가치
    • 각석 명문은 신라 왕실의 구성원, 왕경의 행정구역인 부(部), 갈문왕, 왕권 강화, 여성 지위 등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며, 6-7세기 신라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사료이다.
  2. 왕실 소속부
    • 신라 초기 왕경에는 6개의 정치체가 있었다. 천전리 각석 명문을 비롯한 6세기 초반 금석문에 따르면, 국왕인 법흥왕은 탁부(양부),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은 사탁부(사량부) 소속이다. 신라 왕실은 탁부와 사탁부에 속하였는데, 세력을 키우고 다른 부의 입지를 약화시켜 2부 체제를 이루었다.
  3. 갈문왕(葛文王) 제도
    • 갈문왕은 왕이나 왕비의 아버지, 외할아버지, 동생 등 근친에게 사용하던 왕호이다. 갈문왕이라는 명칭의 뜻은 알 수 없다.
    • 신라 초기에는 박, 석, 김의 3개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을 내며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원래 갈문왕은 왕이 속하지 않은 다른 성씨의 우두머리에게 주는 지위였다. 4세기 후반 김씨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부터 왕의 동생이 갈문왕의 칭호를 주로 받았으며, 법흥왕(재위 514-540) 때까지 그런 관행이 이어졌다.
  4. 왕호의 변화
    • 4세기 말부터 신라의 왕은 “대수장(大首長)”을 뜻하는 ‘매금’으로 불렸으나, 530년대에 들어 대왕(大王), 태왕(太王)으로 격상되었다. 천전리 각석의 535년 명문과 539년 명문에서 법흥왕은 각각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무즉지태왕’으로 일컬어지며 신라 국왕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5. 진흥왕의 활동
    • 사부지갈문왕의 아들인 진흥왕(재위 540-576)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초반에는 어머니인 지몰시혜비가 섭정하였다. 551년부터 진흥왕이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고, 이후 신라 최대의 영토를 개척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 진흥왕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역사서인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고, 불교를 진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흥륜사와 황룡사 등 대규모 사찰을 창건하였다.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가야를 정복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으며, 새로 넓힌 영토를 직접 돌아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 북한산, 함경도 원산의 황초령·마운령 등에 비석을 세웠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청소년 수련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