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Ancient Tombs in Gyo-dong and Songhyeon-dong, Changny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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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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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Ancient Tombs in Gyo-dong and Songhyeon-dong, Changnyeong |
한자 | 昌寧 校洞과 松峴洞 古墳群 |
주소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 129 등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514호 |
지정(등록)일 | 2011년 7월 28일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
수량/면적 | 460,011㎡ |
웹사이트 |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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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해설문
국문
2019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다. 화왕산 서쪽의 창녕읍이 한눈에 보이는 구릉의 경사면과 가지를 치듯 갈라진 가지능선 위쪽으로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처음 알려진 이후 현재까지 흙을 봉긋하게 쌓아올린 봉토분 101기와 봉토가 남아 있지 않은 116기 등 총 217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후 발굴조사에서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5~7세기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과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이 많다.
무덤 안에서는 녹나무로 만든 배 모양의 통나무널을 비롯하여 금동관과 금은장신구, 은관장식, 금동관모, 마구, 장식무기, 비늘갑옷, 철제무기, 철제농공구, 금속용기, 각종 토기와 목기 등 다양한 껴묻거리가 나왔다. 15호분에서 발견된 순장 인골은 16세의 여성으로 복원되어 송현이로 이름을 붙였다.
일부 껴묻거리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출토되는 것과 그 형태가 흡사하여 가야에서 신라로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외래계로 볼 수 있는 대가야계의 귀걸이나 왜(倭)로부터 입수한 녹나무로 만든 널은 삼국시대 비화가야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비화가야, 신라, 왜 등 한반도 안팎의 지역 간 교류 등을 이해하는 데 핵심 자료로 평가된다.
본래 사적 제80호인 창녕 교동 고분군과 사적 제81호인 창녕 송현동 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인접 지역에 있는 두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 제514호로 다시 지정하였다.
- 비화가야: 육가야 가운데 지금의 창녕 지역에 있던 나라
-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주검을 위에서 수직으로 넣도록 옆으로 트인 입구 없이 돌로 네 벽을 짠 무덤
-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세 벽만을 쌓고 한쪽 벽으로 드나든 후 밖에서 나머지 벽을 막아서 만든 무덤
2020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화왕산 서쪽 구릉 일대에 조성된 고대 비화가야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다. 고분군의 범위는 창녕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 경사면에서 서쪽으로 뻗은 가지능선까지 이어진다.
고분군에는 봉분이 남아 있는 무덤 120여 기,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무덤 180여 기 등 모두 300여 기가 넘는 무덤이 있다. 고분군은 무덤의 분포에 따라 크게 4개의 지구로 나누어지며, 각 지구에는 대형 무덤을 둘러싸고 중소형 무덤이 밀집 분포하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무덤의 구조는 대부분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과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이다. 하나의 봉분 안에 하나의 덧널이 있는 형태이며, 별도의 딸린덧널(副槨)이나 순장덧널(殉葬槨)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앞트기식돌방무덤은 고분군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가야 고유의 무덤 구조인 구덩식돌덧널무덤에 입구를 설치한 특이한 형태로 비화가야만의 독특한 무덤 형태로 알려져 있다. 봉분은 만들어진 위치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공간을 구획하여 쌓아 올렸는데, 이는 철저한 계획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비화가야를 대표하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이자 낙동강을 통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의 여러 가야는 물론이고 신라, 백제,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라·백제에서 전해지거나 영향을 받은 장식말갖춤(裝飾馬具), 금동관(金銅冠), 청동세발손잡이솥(靑銅製鐎斗), 둥근고리큰칼(環頭大刀), 은제허리띠와 대가야의 귀걸이, 일본산 녹나무로 만든 관, 사슴뿔로 만든 긴칼(長劍), 조개장식 말띠꾸미개(貝製雲珠) 등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 외 출토된 토기는 비화가야만의 특색 있는 무늬와 형태를 가진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를 비롯해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긴목항아리(長頸壺)가 대표적이다.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대부분의 무덤들이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창녕이 신라로 편입된 이후인 7세기까지 고분군 내에 신라식 돌방무덤이 소규모 군집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가야에서 신라로의 무덤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비화가야의 성립과 발전, 가야에서 신라로의 전환 과정, 고대 한반도 안팎의 정치세력 간 교류와 교섭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중요한 기념물이다.
- 돌로 네 벽을 쌓아 덧널을 만들고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다음 천장돌을 덮는 무덤 양식.
영문
Ancient Tombs in Gyo-dong and Songhyeon-dong, Changnyeong
2019
These tombs were built between 5th and 7th centuries. It is presumed that these were for the rulers of the Gaya confederacy who resided in today’s Changnyeong area.
These tombs were first discovered by a Japanese scholar in 1911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Several excavations since then have revealed that 217 tombs are spread around this area, among which 101 have intact tomb mounds. There are a variety of tomb types, but most are stone-lined tombs and stone chamber tombs with a horizontal entrance.
Artifacts discovered inside the tombs include harnesses, iron weapons, farming tools, armor, metal containers, earthenware, woodware, and diverse jewelry such as a gilt-bronze crown, a silver crown, and gold and silver ornaments. A boat-shaped coffin carved from the trunk of camphor tree, an import from Japan, reveals the cultural exchange between the Changnyeong area and Japan at that time. Some artifacts are similar to those from Gyeongju, the capital of the Silla kingdom (57 BCE-935 CE). This shows that the local elites' cultural orientation at the time was shifting toward Silla.
Found in one of the tombs were the remains of an additional two women and two men beside the tomb's owner. These people likely committed suicide following the death of their master. Among them was a 16-year-old woman.
2020
These ancient tombs scattered across the western slope of Hwawangsan Mountain belonged to the rulers of the small state of Bihwa Gaya, one of the members of the Gaya confederacy (42-562), that controlled the area of today’s Changnyeong. Most of the tombs here are presumed to have been built between 5th and 6th centuries. Some tombs dating to the 7th century, after the area was annexed by the Silla kingdom (57 BCE-935 CE), were also discovered. This archeological site is therefore a valuable source of information on the development of Bihwa Gaya and the process of it becoming a part of the Silla kingdom.
Since the discovery of the site in 1911, a number of excavations have been conducted which revealed around 300 tombs, among which there are 120 remaining burial mounds. The tombs have been divided into four major zones with each zone consisting of large tombs surrounded by clusters of small and medium tombs. The tombs are primarily stone-lined pit tombs and stone chamber tombs with horizontal entrance. The latter type can be found only in Bihwa Gaya tombs and was created by adding an entrance to the typical Gaya-style stone-lined pit tomb.
The area ruled by Bihwa Gaya bordered the other Gaya states and Silla and served as an important transportation point along the Nakdonggang River. Various artifacts excavated on the site testify to the active exchange between Bihwa Gaya and the other states of the Gaya confederacy, the Silla and Baekje kingdoms, and Japan. Artifacts excavated from the tombs include adorned horse-riding accessories, a gilt-bronze crown, a bronze tripod kettle with handles, large swords with rounded pommel, silver waist belts, earrings, long blades made of deer antler, and horse strap ornaments made of shell. A boat-shaped coffin made of camphor tree, a material imported from Japan at that time, was also discovered. Excavated earthenware include mounted dishes with lids, vessel stands, and long-necked jars.
영문 해설 내용
2019
이 고분군은 5~7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창녕 지역에 있던 비화가야의 지배자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인 조사 및 발굴을 통해 총 217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그중 봉토가 남아있는 것은 101기이다. 고분의 구조는 돌덧널무덤과 앞트기식돌방무덤이 다수를 차지한다.
무덤 안에서 발견된 유물에는 금동관, 금·은장신구, 은관장식, 금동관모 등의 장신구와 각종 마구류, 철제 무기류, 비늘갑옷, 철제 농공구류와 금속용기류, 각종 토기류와 목기류 등이 있다. 녹나무로 만든 배 모양의 통나무 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서 입수한 녹나무로 만든 것으로, 당시 창녕 지역과 일본 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부 유물은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과 그 형태가 흡사하여, 이 지역의 지배계층이 가야에서 신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이중 한 무덤에서는 피장자 외에 남성 2명, 여성 2명의 인골이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순장 풍습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이며, 그 중 1구는 16세의 여성으로 밝혀졌다.
2020
화왕산 서쪽 구릉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이 고분군은 당시 창녕 지역에 있던 소국인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다. 대부분의 무덤들은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창녕 지역이 신라에 편입된 이후인 7세기의 신라식 무덤양식도 발견되었다. 비화가야의 발전과 신라로의 전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911년에 처음 발견된 이후 지속적인 조사 및 발굴을 통해, 봉분이 남아 있는 무덤 120 여기,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무덤 180여 기 등 총 300여 기가 넘는 무덤이 확인되었다. 고분군은 크게 4개 지구로 나누어지며, 각 지구에는 대형 무덤을 둘러싸고 중소형 무덤이 밀집 분포하는 형태를 보인다.
무덤의 구조는 대부분 구덩식 돌덧널무덤과 앞트기식 돌방무덤이다. 특히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이 고분군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가야 고유의 구조인 구덩식 돌덧널무덤에 입구를 설치한 특이한 형태이며, 비화가야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무덤 형태이다.
비화가야가 있던 지역은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이자, 낙동강을 통한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가야 연맹의 여러 나라들은 물론 신라, 백제,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장식말갖춤, 금동관*, 청동세발손잡이솥*, 둥근고리큰칼, 은제허리띠, 귀걸이, 사슴뿔로 만든 긴 칼, 조개장식 말띠꾸미개 등이 있다. 특히 녹나무로 만든 배 모양의 통나무 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서 입수한 녹나무로 만든 것이다. 토기로는 뚜껑 달린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긴목 항아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