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향교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보성향교
Boseo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대표명칭 보성향교
영문명칭 Boseo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한자 寶城鄕校
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중앙로 58-23 (보성리)
지정(등록) 종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지정(등록)일 1985년 2월 25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향교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보성향교,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보성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유학을 가르치고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교육 기관이다.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태조 6년(1397년), 당시 보성군수였던 김유양의 주도로 처음 건립되었으며, 이후 양천산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되었고, 선조 35년(1602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지어졌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보성 향교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지어졌다. 앞쪽에는 학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서재가 있으며, 뒤쪽에는 공자와 여러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오성과 송나라의 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동무와 서무에는 각각 동종 9현과 서종 9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보성 향교는 항일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일제는 조선에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주세령을 시행하면서, 향교에서 문묘대제(공자를 기리는 제사)에 사용하려고 만든 제주(祭酒)까지 압수하려 했다. 이에 보성 향교 유림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저항했고, 최창순은 전국 유림 궐기대회를 촉구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유림들은 끝까지 항거했고, 결국 주세령이 개정되어 향교에서는 제주를 빚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보성 향교 제주 조난 사건’으로 불리며, 작은 실천이 항일운동으로 발전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갑오개혁 이후 보성 향교는 교육 기능을 상실했지만, 지금도 유교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항일 독립정신과 올곧은 선비 정신을 간직한 역사적 장소로 의미가 크다.

영문

Boseo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A local Confucian school, called hyanggyo in Korean, is a public education institution of the Goryeo (918-1392) and Joseon (1392-1910) periods. Such schools were established in jurisdictions across the country to serve as a local shrine for Confucius and to promote Confucian education and nurture local elites. Students learned about poetry composition, Confucian Classics, and history.

Boseo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was founded in Gugyedong Village in 1397 under the leadership of Kim Yu-yang, who was serving as magistrate of Boseong at the time. It was later relocated to the western side of Yangcheonsan Mountain before being destroyed in 1597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In 1602, it was rebuilt at its current location and has since undergone multiple repairs.

The complex follows the traditional Confucian school layout, consisting of two dormitories and a lecture hall named Myeongnyundang at the front and two auxiliary shrines and a main shrine named Daeseongjeon at the back. The main shrine enshrines the spirit tablets of 25 Chinese and Korean Confucian sages, including Confucius, and veneration ceremonies are still held here every spring and autumn.

Notably, the school was an active venue for the anti-Japanese resistance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In 1921, the Japanese government enacted a liquor tax law prohibiting Koreans from brewing alcohol, even confiscating liquor prepared at Confucian schools for veneration ceremonies. In response, Confucian scholars in Boseong strongly resisted, leading to the revision of the law, which eventually allowed Confucian schools to continue brewing alcohol for ceremonial purposes.

영문 해설 내용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국립교육기관이다. 이러한 향교들은 전국 각 지역에 설립되어 공자를 모시는 지역 사당의 역할을 하며, 유학을 교육하고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학생들은 시를 짓는 법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배웠다.

보성향교는 1397년 당시 보성군수였던 김유양이 주도하여 구계동에 건립되었다. 양천산 서쪽으로 옮겨졌다가 임진왜란 때인 1597년에 소실되었고, 1602년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어져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보성향교는 강당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앞쪽에 있고, 뒤쪽에는 내삼문, 사당인 대성전, 부속 사당인 동무·서무가 자리한 전형적인 형식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한국의 유교 성현 25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현재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보성향교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921년 일제는 한국인들이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주세령을 시행하였고, 향교에서 제사에 사용하려고 만든 술까지 압수하려 했다. 이에 보성 유림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저항했고, 결국 주세령이 개정되어 향교에서는 술을 빚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