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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29일 (월) 18: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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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지명에 남은 광주의 호랑이

이야기

광주에서 호랑이는 단지 전설로만 전해지지 않는다. 오래된 문헌과 시, 그리고 지명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며, 한 시대의 생활 감각과 공간 기억을 함께 드러낸다.

먼저 강항(姜沆, 1567~1618)이 지은 「광주향교 중수상량문(光州鄕校重修上梁文)」에는 광주향교(光州鄕校)의 이전과 중수 배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곽 밖에 있던 옛 향교 주변에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정황이 기록된다. 향교가 자리 잡아야 할 공간을 다시 선택하는 문제는 단순한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체감하던 위협과 일상의 안전과도 맞닿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18세기 초 조정만(趙正萬, 1656~1739)광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유림숲 일대에서의 수렵 경험을 바탕으로 「柳林藪觀獵次杜工部冬狩行韻寄雪岳山人要和戊子」를 남겼다. 이 작품은 관원이 주도한 사냥의 장면을 시적으로 옮기며, 당시 호랑이가 ‘산속의 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대응해야 하는 존재였음을 드러낸다. 나아가 유림숲은 이 시의 배경이자, 호랑이 출몰과 수렵의 기억이 포개지는 장소로 읽힌다.

19세기 말의 체감은 나도규(羅燾圭, 1826~1885)의 「서석록(瑞石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전해진다. 글 속에서 증심사 인근 주막집 주인은 호랑이의 위협 때문에 개와 돼지를 밤에는 밖에서 기르지 못하고 반드시 우리 안에 들여놓아야 했다고 말하며, 또 호랑이가 개구리 소리를 빌려 접근한다는 산중의 전승도 함께 들려준다. 이 기록은 호랑이가 공동체의 생활 리듬과 대응 방식을 바꾸어 놓을 만큼 가까운 위험이었음을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금동을 가리키던 옛 이름 함정몰은, 호랑이를 잡기 위한 함정을 파놓았다는 기억을 품고 있다. 이렇게 광주의 호랑이는 문헌과 시, 그리고 지명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반복해서 포착되며, 무등산 자락의 삶이 어떤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도 이어졌는지를 조용히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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