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벽당(環碧堂)은 조선 명종 때 나주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金允悌, 1501 ~ 1572)가 을사사화를 겪고 낙향해 중건한 정자로 광주광역시 북구 환벽당길(충효동) 광주호 위쪽에 있다. 당호는 신잠이 지었다. 1972년 광주시 기념물 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명승 제107호 환벽당 일원으로 승격됐다.
‘환벽(環碧)’이란 푸르름으로 둘러쌓인 곳이라는 뜻으로 주변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소쇄원 등과 더불어 별서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이다.
남향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이 있으며, 앞쪽과 오른쪽은 마루다. 원래는 방이 없는 전통 누정 건물이었으나, 김윤제가 증축하면서 현재 모습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식영정처럼 독립된 정자가 아니라 아래에 김윤제의 살림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다.
환벽당이 정(亭)이 아닌 당(堂)으로 이름붙인 이유는 조선시대 누정 명칭 원칙에 따른 것으로 당(堂)은 터를 높이 돋우어 높게 지었으며, 양 옆과 뒤는 막히고, 앞은 탁 뜨인 건축물을 말한다. 당당하고 자신감있는 모습을 빗대 지었다고 한다. 당(堂)으로 이름 지어진 조선시대 건축물로는 소쇄원의 제월당, 해남 녹우당 등이 있다.
환벽당은 송강 정철과도 인연이 깊은 누정이다. 증암천 건너 지실마을에 살던 정철은 김윤제를 우연히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과거에 급제해 출사하기까지 10년간 환벽당에서 유숙하며 공부했다. 서하당의 주인 김성원, 의병장 제봉 고경명이 함께 공부했으며, 김윤제는 그의 외손녀를 정철에게 시집보냈다.
당대의 석학인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등이 드나들 던 곳으로 현재 걸려 있는 편액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면앙정 송순은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하며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하면서,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증암천 안의 세 명승이라 했다. 소세양(1486~1562)이 지은 ‘환벽당’ 시에서 초기 모습을 알 수 있으며, 김성원은 ‘서하당유고’에 환벽당 일원 모습을 그린 ‘성산계류탁열도’를 남겼으며. 임억령의 시가 편액으로 남아있다.
근처에 취가정이 있으며, 증암천 건너 식영정이, 위로 올라가면 소쇄원, 그 위쪽에 독수정이 있어 짧은 시간에 호남 원림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다. 동백이 피는 이른 봄이나 상사화가 만개한 9월에 찾으면 경치가 특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