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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나옹화상이 지은 「석실무등산」이 전한다. 시대와 인물은 달랐지만, 이들의 글 속 무등산은 늘 푸르고 장엄했다. |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나옹화상이 지은 「석실무등산」이 전한다. 시대와 인물은 달랐지만, 이들의 글 속 무등산은 늘 푸르고 장엄했다. | ||
2025년 9월 25일 (목) 20:19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문인들이 남긴 무등산 감상기
이야기
조선시대, 무등산은 수많은 문인들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1574년 고경명은 승려 조선의 안내로 증심사와 증심사 취백루를 거쳐 산을 유람하며 『유서석록』에 그 풍광과 유래를 남겼다. 이 기록에는 이순인과의 교유, 취백루의 이름에 얽힌 사연까지 담겨, 훗날 『제봉집』의 한 부분이 되었다.
세기가 바뀌어 1778년, 정약용은 천왕봉에 올랐다. 그는 「등서석산」과 『유서석산기』에 서석대와 주변 경관을 시와 산문으로 남겼다. 그의 발자취는 같은 제목의 글을 남긴 정지유와도 맞물리며, 무등산 기록 문학의 계보를 잇는다.
근대에 들어 김윤식은 「광주무등산천황봉光州無等山天皇峯」에서 천왕봉의 웅혼한 기상을 묘사했고, 이 시는 그의 문집 『운양집』에 실렸다. 송병선은 「서석산기」에서 서석대 유람의 감흥을, 조봉묵은 『유무등산기』에서 무등산 전경을 그렸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나옹화상이 지은 「석실무등산」이 전한다. 시대와 인물은 달랐지만, 이들의 글 속 무등산은 늘 푸르고 장엄했다.
이렇듯 무등산은 시와 기행문, 기록과 설화 속에서 수백 년을 이어온 영감의 산이었다. 절과 누각, 봉우리와 암석이 문인들의 붓끝에서 다시 태어나며, 그 감상기는 오늘날까지도 산이 품은 시간의 깊이를 전해준다.
스토리 그래프
이야기 지도
- 문인들의 광주에 대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