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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파트는 오월항쟁의 긴박한 나날 속에서 활동의 출발점이자 귀환지가 되었고, 이후 이를 기리는 들불코스와 윤상원코스에 포함되었다. 이 코스들은 | + | 아파트는 오월항쟁의 긴박한 나날 속에서 활동의 출발점이자 귀환지가 되었고, 이후 이를 기리는 들불코스와 윤상원코스에 포함되었다. 이 코스들은 오월민중길로 묶인 다른 코스로도 이어져, 당시 열사들의 삶과 발자취를 오늘날 시민들이 직접 밟아볼 수 있는 길이 되었다. |
[[윤상원]]은 [[박관현]]과 동지로서 함께 투쟁했고, 이들이 제작·배포한 『[[투사회보]]』는 [[5.18의_진실_알리기_활동|5.18의 진실 알리기 활동]]의 핵심 매체였다. 신군부가 퍼뜨린 왜곡에 맞서, 투사회보는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시민들에게 전달했다. | [[윤상원]]은 [[박관현]]과 동지로서 함께 투쟁했고, 이들이 제작·배포한 『[[투사회보]]』는 [[5.18의_진실_알리기_활동|5.18의 진실 알리기 활동]]의 핵심 매체였다. 신군부가 퍼뜨린 왜곡에 맞서, 투사회보는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시민들에게 전달했다. | ||
2025년 8월 15일 (금) 14:36 기준 최신판
아파트: 들불 열사들의 활동지
이야기
1980년대 초, 광천시민아파트는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었다. 이곳은 윤상원, 박관현, 박용준 등 들불7열사가 살며, 들불야학을 중심으로 노동자 교육과 민주화 운동을 이어간 공간이었다. 1978년 문을 연 들불야학은 광주 최초의 노동야학으로, 노동자 실태조사와 교육을 통해 지역 노동운동의 거점이 되었으나, 5.18민주화운동과 그 이후 신군부의 탄압 속에 문을 닫아야 했다.
아파트는 오월항쟁의 긴박한 나날 속에서 활동의 출발점이자 귀환지가 되었고, 이후 이를 기리는 들불코스와 윤상원코스에 포함되었다. 이 코스들은 오월민중길로 묶인 다른 코스로도 이어져, 당시 열사들의 삶과 발자취를 오늘날 시민들이 직접 밟아볼 수 있는 길이 되었다.
윤상원은 박관현과 동지로서 함께 투쟁했고, 이들이 제작·배포한 『투사회보』는 5.18의 진실 알리기 활동의 핵심 매체였다. 신군부가 퍼뜨린 왜곡에 맞서, 투사회보는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시민들에게 전달했다.
오늘날 광천시민아파트는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들불야학과 열사들의 삶, 그리고 1980년 5월의 진실을 품은 기억의 장소다. 길을 따라 걸으면, 투사회보의 인쇄 잉크 냄새와 함께 청년들의 결의가 느껴지고, 오월의 정신을 잇는 길들이 서로 연결되어 그 시절의 항거를 지금으로 이어준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