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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실|박동실(朴東實、 1897~1968)]]은 [[광주권번]]의 학감으로 재직하며 서편제 판소리를 가르치고, 무대와 창작을 오가던 시대의 명창이었다. 일제강점기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양명사]]와 같은 근대적 상설 극장에서 판소리와 창극 무대를 이끌었다.
 
[[박동실|박동실(朴東實、 1897~1968)]]은 [[광주권번]]의 학감으로 재직하며 서편제 판소리를 가르치고, 무대와 창작을 오가던 시대의 명창이었다. 일제강점기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양명사]]와 같은 근대적 상설 극장에서 판소리와 창극 무대를 이끌었다.
  
그는 항일 투쟁의 정신을 담은 창작판소리 《[[열사가]]》를 작곡했고,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해방가]]》를 만들어 시대의 변화를 소리에 실었다. 절기의 변화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단가 '사철가'도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창작 활동은 단순한 예술을 넘어, 민족의 목소리를 지켜낸 기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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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일 투쟁의 정신을 담은 창작판소리 《[[열사가]]》를 작곡했고,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해방가》를 만들어 시대의 변화를 소리에 실었다. 절기의 변화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단가 '사철가'도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창작 활동은 단순한 예술을 넘어, 민족의 목소리를 지켜낸 기록이기도 했다.
  
박동실의 곁에는 거문고 대가인 [[박석기(朴錫驥、 1899~1952)]]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화랑창극단]]을 창단하여 전통 창극의 저변을 넓혔다. [[광주권번]] 출신 예인들과 서편제의 맥을 잇는 창극은 전라도의 무대 위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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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실의 곁에는 거문고 대가인 [[박석기|박석기(朴錫驥、 1899~1952)]]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화랑창극단]]을 창단하여 전통 창극의 저변을 넓혔다. [[광주권번]] 출신 예인들과 서편제의 맥을 잇는 창극은 전라도의 무대 위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의 예술적 역량은 해방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민배우' 칭호를 받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박동실]]의 이름은 단순한 명창을 넘어, 작곡과 공연, 그리고 시대를 노래한 예술가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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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예술적 역량은 해방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인민배우' 칭호를 받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박동실]]의 이름은 단순한 명창을 넘어, 작곡과 공연, 그리고 시대를 노래한 예술가로 기억된다.
  
 
== 스토리 그래프 ==
 
== 스토리 그래프 ==

2025년 8월 14일 (목) 19:40 판

박동실의 작곡, 공연 활동

이야기

박동실(朴東實、 1897~1968)광주권번의 학감으로 재직하며 서편제 판소리를 가르치고, 무대와 창작을 오가던 시대의 명창이었다. 일제강점기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양명사와 같은 근대적 상설 극장에서 판소리와 창극 무대를 이끌었다.

그는 항일 투쟁의 정신을 담은 창작판소리 《열사가》를 작곡했고,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해방가》를 만들어 시대의 변화를 소리에 실었다. 절기의 변화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단가 '사철가'도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창작 활동은 단순한 예술을 넘어, 민족의 목소리를 지켜낸 기록이기도 했다.

박동실의 곁에는 거문고 대가인 박석기(朴錫驥、 1899~1952)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화랑창극단을 창단하여 전통 창극의 저변을 넓혔다. 광주권번 출신 예인들과 서편제의 맥을 잇는 창극은 전라도의 무대 위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의 예술적 역량은 해방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인민배우' 칭호를 받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박동실의 이름은 단순한 명창을 넘어, 작곡과 공연, 그리고 시대를 노래한 예술가로 기억된다.

스토리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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