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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4-M002 | 시간을 넘어 진실을 찾아서]]  》 계엄군의 시위 진압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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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4-M001 | 시간을 넘어 진실을 찾아서]]  》 시위 확산 및 도심 충돌'''=
  
 
==스토리 내러티브==
 
==스토리 내러티브==
[[5.18민주화운동|1980년 5월의 광주]]는 역사적인 순간들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불타오르던 그 시절, 여러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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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는 뜨거운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은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시위 진압으로 불타올랐다. 이는 시민들의 저항과 참여를 촉발시켰고, 바로 다음 날인 5월 19일에는 시민들의 참여가 더욱 확산되면서 [[광주공원]]과 [[금남로]] 등지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5월 18일, [[계엄군]]의 무차별 시위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저항과 참여를 촉발시켰고, 바로 다음 날인 5월 19일에는 시민들의 참여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광주공원]]과 [[금남로]], 그리고 [[옛 광주MBC]]와 [[옛 전남도청]]이 주요 장소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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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김영찬]]이라는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의 3학년 학생은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특히, 5월 19일은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최초의 발포가 있었고, [[김영찬]] 학생이 그 총격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날, [[김안부]]라는 또 다른 시민도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고, [[전남대학교병원]]에 안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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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부]]라는 또 다른 시민도 그날 목숨을 잃었다. 그는 [[전남대학교병원]] 안치실에 안치되었고,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은 시민들의 저항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이후 5월 20일에는 차량 시위가 금남로에서 벌어졌고, 이는 [[옛_MBC_방화_사건|MBC 방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날, 시민을 향한 최초의 집단 발포 사건도 발생했으며, 계엄군도 최초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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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차량 시위를 벌이며 금남로를 달렸다. 택시 200여 대가 전조등을 켜고 경력을 울리며 시위에 참여했고, 이는 곧바로 [[옛_MBC_방화_사건|MBC 방화]]로 이어졌다. 방송이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항의의 의미였다. 이 사건은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과의 또 다른 충돌로 이어졌고, 최초의 집단 발포 사건이 발생했으며, 계엄군도 최초로 사망했다.
  
계엄군은 이 모든 사건들을 이끌며 [[조선대학교]]와도 관련이 깊었습니다. 당시 조선대학교에는 약 1,000명의 계엄군이 주둔해 있었으며, [[조선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의 학생인 김영찬도 이들과 얽힌 사건의 피해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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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거리와 공원, 그리고 [[옛 전남도청]]까지, 모든 곳이 저항과 희생의 현장이었다. 계엄군 1,000여명은 [[조선대학교]]에도 주둔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광주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민주화를 향한 길을 열어갔다. 이 모든 사건들은 민주화 운동의 큰 획을 그으며 대한민국 역사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처럼 5월의 광주는 끔찍한 폭력 속에서도 시민들이 용기 있게 맞서 싸운 현장이었습니다. 각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고 그 속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민주화를 향한 그들의 투쟁은 계속해서 기억될 것입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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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Network 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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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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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Network 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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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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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2024-M001|시간을 넘어 진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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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2024-M001|계엄군의 시위 진압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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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2024-M002|시위 확산 및 도심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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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2024-M003|시민군과 계엄군 충돌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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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2024-M004|1980년 시민들의 광주 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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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2024-M005|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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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2023-118|광주의 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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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2023-118a|작은 거인들의 큰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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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2024-M001|계엄군의 대학생 시위 진압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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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2023-118d|용감한 그들을 기리는 특별한 건물들]]
  
 
[[분류:Story]] [[분류:Story/2024]] [[분류:이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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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4일 (화) 12:53 기준 최신판


시간을 넘어 진실을 찾아서 》 시위 확산 및 도심 충돌

스토리 내러티브

1980년 5월, 광주는 뜨거운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5.18민주화운동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시위 진압으로 불타올랐다. 이는 시민들의 저항과 참여를 촉발시켰고, 바로 다음 날인 5월 19일에는 시민들의 참여가 더욱 확산되면서 광주공원금남로 등지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날, 김영찬이라는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의 3학년 학생은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김안부라는 또 다른 시민도 그날 목숨을 잃었다. 그는 전남대학교병원 안치실에 안치되었고,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은 시민들의 저항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차량 시위를 벌이며 금남로를 달렸다. 택시 200여 대가 전조등을 켜고 경력을 울리며 시위에 참여했고, 이는 곧바로 MBC 방화로 이어졌다. 방송이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항의의 의미였다. 이 사건은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과의 또 다른 충돌로 이어졌고, 최초의 집단 발포 사건이 발생했으며, 계엄군도 최초로 사망했다.

광주의 거리와 공원, 그리고 옛 전남도청까지, 모든 곳이 저항과 희생의 현장이었다. 계엄군 1,000여명은 조선대학교에도 주둔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광주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민주화를 향한 길을 열어갔다. 이 모든 사건들은 민주화 운동의 큰 획을 그으며 대한민국 역사에 깊이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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